한줄 詩

사람의 재료 - 이병률

마루안 2018. 3. 23. 21:11

 

 

사람의 재료 - 이병률

 


오늘은 약속에 나가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왜 오지 않는 거냐고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황급히 일어나 간판을 다시금 확인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앉았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이 바다의 물을 다 퍼서 다른 바다로 옮기는 일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라 가능했다고 믿었다


꽃이 꽃을 꺾는다거나
비가 비를 마시게 된다는 식의 일들
우정의 모든 사랑이라든가
그로 인해 어제는 가볍지 않았다는 기록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대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만으로
이제 감각도 없는 굳은살들을 떼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재료들 사이에서
무조건 속의 조건들을 골라낼 줄 알게 된다면


저편에 또 다른 나 하나가 생성된다는
잔인한 가정을 믿기로 한다면
정말이지 누군가에게 무언가라도 되어야겠는데


오늘 한 일이라곤
약속에 나가 감히 다른 자리에 앉아 있다 온 거였다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사람이 온다 - 이병률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정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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