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각성제 - 이문재

마루안 2018. 3. 22. 21:43

 


각성제 - 이문재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태풍 한가운데를 지나 남녘 상갓집 다녀오는 길
기억력이 상했는가 자꾸 눈 들어 뒤를 돌아본다
덕수궁 어귀, 길바닥에 짓이겨진 나뭇잎들이
말간 냄새를 피운다 죽는 것들이 흩뿌리는 냄새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들의 향기
언제 가벼웁다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까


덕수궁 잔등, 재개발 지구, 내부수리한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가정식?
비가정식 백반도 있을까, 식당에만 남아 있는 가정식으로
혼자 점심을 먹는 중년은 서글프다. 이 지방에서
혼자는 자주 죄악이다


깨끗한 옷, 아니 옷 깨끗하게 입고 수염도 좀 깎고
늘 오른쪽으로 기우는 고개도 좀 반듯하게 하고, 목 뒷덜미
자욱한 비듬도 털고, 이 가을의 변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설익은 중년이 꿈꾸었던 것은 별게 아니었다
동사무소와 은행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
옛날은 가지 않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몸은 또 가벼운 알코올을 부르고 내 두 발은 버짐 같은
발자국을 남기며 어두운 실내, 지하를 향한다 마은에 가까운
한 포유류의 한살이가 털부덕, 주저앉는다


몸아, 그래, 너 먼저 가, 있거라


 

*시집,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 이문재

 

 

나, 죄 조금 짓고
많이 뉘우치며 살 줄 알았다


밤새도록 번개 칠 때
엘리베이터가 공중에서 멈출 때
분만실 앞에서 서성거릴 때
비행기가 뉘늦게 이륙할 때
생년월일시를 댈 때


땅에 넘어진 자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다


나, 죄 많이 짓고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살았다
나, 죄에 걸려 넘어지고서도
그 죄를 온몸에 묻히려 하지 않았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