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마흔 고개에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뻐끔대는 물고기같이 살 순 없다고
장맛비에 질질 젖은 구두를 끌며
낙향한 사내가 있었네
희망양록원
마지막이라고
마누라도 피붙이도 버린 놈이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쑥이다, 칡넝쿨이다 잡풀을 찾으러
비에 젖은 산비탈을
산록처럼 뛰어다녔네
누군가
장대비 속 꼴을 베는 어둠의 동태를 목격했다네
젖은 구두째 문지방에 나부라진 어둠을 보았다고 하였네
저러다간 큰일 나지, 정말 큰일 나지
좋아했던 소주 한잔 하라는 권유마저 마다하고
여름이 되어 드디어
뿔 자를 때가 되었네
녹혈(鹿血)을 받을 때가 되었네
약초를 탄 물에다 너덧 병 활명수를 섞고
마취총을 쏜 다음 얼추 큰 놈 뒷다리를 묶으려는데
벌떡 일어난 녀석의 발길질에
마흔 고개에 홀로 남은 사내
여물통으로 피하다 댓바람 가슴을 밟혔다네
며칠이 지나 종합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없는 사내가 한 공간을 차지하고
의사는 왼쪽 가슴에 구멍을 뚫어 누런 고름을 받았다네
양록원 비탈에선 며칠 굶은 사슴들이 연신
퍼런 눈빛으로 뒷발을 차고
식도가 터져 체온이 사십 도까기 오르내린
그 사내 장렬한 결전을 치렀다네
양록원 주인 너볏하게 숨 거둘 때
비에 젖은 한 켤레 구두만
길섶 개구리마냥 물꼬 터져 울고
건너편 축사에선
이미 입원비로 팔린 사슴들이 얕은 숨만 죽였네
지상에서 가장 치열한 삶을 산
진정한 패자(敗者)를 위해 모두 고개를 숙였다네
*시집,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고요아침
눅눅한 꿈처럼 다가온 죽음 - 김응수
새끼줄이었다 꽤나 긴 이승의 끈
양손에 쥔 채
앞치마를 두른 남자 몇이 뒤꼍에서
잔뜩 낮추어 포진을 하고
사람들은 낮씹 구경하듯 끼드득거릴 때
차가운 비가 내리고
차운 땅에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잠시 쉬는가 몇 분 유예된 목숨
그런대로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지
시멘트바닥에 코를 비벼 먹이를 찾네
간혹 쉽게 혀를 넘어가는 먹을거리라도
단지 장난하기 좋아하는 고등동물의 하사품일 뿐
비가 그쳤다
네 다리가 묶여 누운 돼지
튀어나온 아랫배를 달포 전 신문지에 대고
해거름에 황금빛 살갗의 위용을 드러낸 채
청명 조금 지난
창설기념 체육대회 다음날,
우승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은데
느닷없이
희번드르르하게 생긴
의무대에서 기르는 똥개가 짖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단 한 번 쉬는 숨조차 죽기보다 어려운 줄을
비로소 깨달을 때 자다 깬
눅눅한 꿈처럼 여름은 선뜻 다가오는가 보다
*시인의 말
간만에 비 오니
유혹의 비가 오니
포도 따라 어우러진 버들개지가 푸르다
비가 올 때마다 언제나
나의 생존과 무릎 맞추는 진회색빛 인과
더불어 우기와 번갈아 닥쳐오는
적소(謫所)에 사는 간략한 가난
자, 비가 그쳤으니 그대도
길을 떠나라
비 오지 않으니
그대가 비가 되어
쓰라린 적소를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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