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마루안 2018. 3. 22. 19:33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마흔 고개에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뻐끔대는 물고기같이 살 순 없다고

장맛비에 질질 젖은 구두를 끌며

낙향한 사내가 있었네

 

희망양록원

 

마지막이라고

마누라도 피붙이도 버린 놈이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쑥이다, 칡넝쿨이다 잡풀을 찾으러

비에 젖은 산비탈을

산록처럼 뛰어다녔네

 

누군가

장대비 속 꼴을 베는 어둠의 동태를 목격했다네

젖은 구두째 문지방에 나부라진 어둠을 보았다고 하였네

저러다간 큰일 나지, 정말 큰일 나지

좋아했던 소주 한잔 하라는 권유마저 마다하고

여름이 되어 드디어

뿔 자를 때가 되었네

녹혈(鹿血)을 받을 때가 되었네

약초를 탄 물에다 너덧 병 활명수를 섞고

마취총을 쏜 다음 얼추 큰 놈 뒷다리를 묶으려는데

벌떡 일어난 녀석의 발길질에

마흔 고개에 홀로 남은 사내

여물통으로 피하다 댓바람 가슴을 밟혔다네

 

며칠이 지나 종합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없는 사내가 한 공간을 차지하고

의사는 왼쪽 가슴에 구멍을 뚫어 누런 고름을 받았다네

 

양록원 비탈에선 며칠 굶은 사슴들이 연신

퍼런 눈빛으로 뒷발을 차고

식도가 터져 체온이 사십 도까기 오르내린

그 사내 장렬한 결전을 치렀다네

양록원 주인 너볏하게 숨 거둘 때

비에 젖은 한 켤레 구두만

길섶 개구리마냥 물꼬 터져 울고

건너편 축사에선

이미 입원비로 팔린 사슴들이 얕은 숨만 죽였네

지상에서 가장 치열한 삶을 산

진정한 패자(敗者)를 위해 모두 고개를 숙였다네

 

 

*시집,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고요아침

 

 

 

 

 

 

눅눅한 꿈처럼 다가온 죽음 - 김응수

 

 

새끼줄이었다 꽤나 긴 이승의 끈

양손에 쥔 채

앞치마를 두른 남자 몇이 뒤꼍에서

잔뜩 낮추어 포진을 하고

사람들은 낮씹 구경하듯 끼드득거릴 때

차가운 비가 내리고

차운 땅에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잠시 쉬는가 몇 분 유예된 목숨

그런대로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지

시멘트바닥에 코를 비벼 먹이를 찾네

간혹 쉽게 혀를 넘어가는 먹을거리라도

단지 장난하기 좋아하는 고등동물의 하사품일 뿐

 

비가 그쳤다

네 다리가 묶여 누운 돼지

튀어나온 아랫배를 달포 전 신문지에 대고

해거름에 황금빛 살갗의 위용을 드러낸 채

청명 조금 지난

창설기념 체육대회 다음날,

우승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은데

 

느닷없이

희번드르르하게 생긴

의무대에서 기르는 똥개가 짖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단 한 번 쉬는 숨조차 죽기보다 어려운 줄을

비로소 깨달을 때 자다 깬

눅눅한 꿈처럼 여름은 선뜻 다가오는가 보다

 

 

 

 

 

*시인의 말

 

간만에 비 오니

유혹의 비가 오니

포도  따라 어우러진 버들개지가 푸르다

비가 올 때마다 언제나

나의 생존과 무릎 맞추는 진회색빛 인과

더불어 우기와 번갈아 닥쳐오는

적소(謫所)에 사는 간략한 가난

 

자, 비가 그쳤으니 그대도

길을 떠나라

비 오지 않으니

그대가 비가 되어

쓰라린 적소를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