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거사(臥遊居士)를 위한 변명 - 황원교
누워선 천리
앉으면 삼천리니
일어서면 구만리 밖도 한 눈(目)이리라
비록 드러누워 비벽한 삶을 연명하지만
봄바람에 복사꽃 날려 오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다
설사
죽은 뒤에 지옥불로 시달린다 해도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다
누워서 생각만으로 천리를 오가니
앉는 순간 삼천리를 내다볼 테고
일어서면 단숨에 구만리도 달려가리라는 결기(決起)를
어느 누가 돌을 던질 텐가
누우면 천리,
앉으면 삼천리 밖으로 단숨에 달려가는
이 마음을
*시집, 오래된 신발, 문학의전당
오래된 신발 - 황원교
1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들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
드럽게 흙을 묻히고
재수 없게 똥도 밟아보고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에도 풍덩 빠져보고
빙판에선 꽈당 미끄러져도 보고 싶은
오래된 신발 한 켤레.
24년째
흙 한 톨 묻혀보지 못한 채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 들고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발에 신겨 있다고 다 신발인가
제 발로 길을 걸어가야
제대로 된 신발 노릇을 하는 게지
죽기 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거나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
마비된 사지(四肢)를 싣고
흰 구름처럼 둥둥
땅 위를 떠다니는 꿈이여!
2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는 짚신을 버렸고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버렸고
지난겨울
막내 동생도 현관에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영영 떠나버렸다
나도 언젠가 너를 버려야 하리
대문 밖 허공 속으로 길게 난 발자국들이
저렇게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 황원교 시인은 1959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강원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경추손상에 의한 사지마비영구장애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시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입에 마우스 스틱을 문 채 창작에 몰두했다.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0년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빈집 지키기>, <혼자 있는 시간>, <오래된 신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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