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과 길과 밥 - 김장호

마루안 2018. 3. 21. 21:51



별과 길과 밥 - 김장호
-전봇대 40



사랑하는 이여,
저기 전봇대가 꿈꾸는 별을 보아라
별은 간절한 소망이고, 소망은 간절한 별이거늘
세상에 빛나지 못할 별이란 없다
내남없이 우리는 하나의 별이다


사랑하는 이여,
저기 전봇대가 꿈꾸는 길을 보아라
길은 새로운 믿음이고, 믿음은 새로운 길이거늘
세상에 가지 못할 길이란 없다
내남없이 우리는 하나의 길이다


사랑하는 이여,
저기 전봇대가 꿈꾸는 밥을 보아라
밥은 뜨신 사랑이고, 사랑은 뜨신 밥이거늘
세상에 나누지 못할 밥이란 없다
내남없이 우리는 한 그릇의 밥이다


사랑하는 이여,
날마다 새날 아닌 날 있더냐
우리 한번 별과 길과 밥이 될 일이다



*시집, 전봇대, 한국문연








잠만 잘 뿐! - 김장호
-전봇대 32



한겨울 냉천동 버스정류소
전봇대 장딴지에 검정 매직펜으로
새겨놓은 네 마디 지문


벙거지모자에 걸망을 멘 사내가
말의 뼈다귀 물고 슬금슬금 따라간다


잠만 잘 분?
잠만 잘 뿐!


이곳이 잠의 집이에요
맘에 맞는 관棺을 골라보세요
냉방이지만 뜨신 꿈은 꿀 수 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찾는 한 평짜리 관
사내가 문 열고 들어가더니
어깨의 등걸잠 부리고 관 뚜껑을 닫는다


어둠 속에 잠든 떠돌이별처럼
고꾸라진 채 곤하게 잠들고 싶지만
추위 타는 잠이 자꾸 달아나기만 하여
아이 어르듯 잠의 등을 토닥여준다


어서 잠들어야지, 그래야
관속에 누운 세상의 시린 영혼을 덥히러
햇솜 같은 아침해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 신기하지, 밑줄을 긋고 싶은 기막힌 문장 없이도 시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쉬운 문장 속에 삶의 애환이 담긴 시가 한없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이렇게 쓸쓸한 시를 세상에 낸 시인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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