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행에 대하여 - 윤중목

마루안 2018. 3. 17. 22:49



불행에 대하여 - 윤중목



불행은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때로는 사선으로 때론 곡선으로
늘, 불침번 선 눈의 정면을 비끼어 온다.
불행이 드디어 가시각도로 들어온 때,
몸에는 이미 이곳저곳
젤리 같은 빨판들이 호스를 박고 있다.
쭈욱- 쭈우욱-
죽지 않을 만큼의 피와
죽지 않을 만큼의 진액을
뽑아 먹고 나서야 불행은 비로소
퉁퉁 불은 빨판을 거둔다, 갈 때도
불행은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물러나는 동선을 좌우로 비틀며 간다.
그렇게 최후까지 제 수명을 늘인다.



*시집, 밥격, 천년의시작








굴욕 - 윤중목



주머니 위아래로 까뒤집어보지만
나갔다 올 왕복 버스비에도 보자랄 때.


달랑 세 까치 남은 담배를 지금
한 개는 피우나 마나 주빗거릴 때.


봉지쌀 희끗하게 바닥이 보이고
라면 종류는 진작 다 떨어졌을 때.


그것도 모르고 배 속에선 밥 달라고
크레셴도로 계속 신호음을 보내올 때.


벼룩시장, 교차로, 가로수
죄다 구인 광고들 나이 제한에 걸릴 때.


처가고 본가고, 친구고 친구의 친구고
손 또 벌릴 위인 나부랭이 더는 정말 없을 때.


그래도 밤이면 옆에 누운 아내에게
잘난 그 아랫도리 불뚝거릴 때.


어떤 시인이 한 '굴욕은 아름답다'는 말이
젠장, 털끝만큼도 아름답게 들리지 않을 때.





# 대책 없는 불행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마치 이미 정해진 것처럼 시인이 겪었을 풍파가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런 시를 읽을 때 운명이란 걸 믿는다. 곡절을 잘 견뎌낸 스스로의 위로일까.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마흔을 넘어서며 많은 것을 잃었다.
원망했고 분노했고, 끝내 두 무릎이 꺾였다.
그 후로도 세월은 오래도록 내 살을 발라 먹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또 일어섰고,
이번에는 세월아,
내가 네 살을 발라 먹을 차례 아니냐.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