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 홍윤숙

마루안 2018. 3. 17. 22:27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 홍윤숙



왜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면
마음 설렐까
그 길에 뜨는 해는 무엇이 다른가
큰 숲에 이르는 작은 숲이 있고
숲길 사이로 냇물 흐르고
냇물 건너 마을엔
어진 사람들 모여 살 것 같은
따뜻한 화덕에 활활 불 피워놓고
낯선 나그네들 융숭히 맞이할 것 같은
그 길 위에 하나의 세계가 다가오고
다가와 눈부신 아침을 열고
해와 달 별들이
새로운 날을 열 것 같은

 
악보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어린 풀들 무릎에 안고 춤추는 길
실바람에 머리칼 나부끼며
누구나 한번은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서
세상을 여는 또하나의 열쇠를
가슴 두근거리며 두 손에 쥐어본다
그러나 열쇠는 이윽고 녹이 슬고
그 길도 지나온 길과 다를 것 없음을
희망과 실망은 언제나 손등과 손바닥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 문학동네








여기서부터는 - 홍윤숙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동행할 수 없다
보던 책 덮어놓고 안경도 전화도
신용카드도 종이 한 장 들고 갈 수 없는
수십 억 광년의 멀고먼 여정
무거운 몸으로는 갈 수 없어
마음 하나 가볍게 몸은 두고 떠나야 한다
천체의 별, 별 중의 가장 작은 별을 향해
나르며 돌아보며 아득히 두고 온
옛집의 감나무 가지 끝에
무시로 맴도는 바람이 되고
눈마다 움트는 이른 봄 새순이 되어
그리운 것들의 가슴 적시고
그 창에 비치는 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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