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마루안 2018. 3. 16. 20:23

 

 

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멀리 사라져간 하늘은 불타올라
잿보라로 날리는 마을은 이제 쓸쓸하다
가을, 다치고 다치고 뒤덮인 계절은
늙은 반장님 뒤통수에 나뭇잎으로 붙어서
성질을 버럭 내고 달겨드는 햇살과 싸워
누렇고 질긴 힘줄만 만들어 놓고 간다
이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바람과 싸워 죽으면
다행이겠다 너무 오래 자란 손톱은
부르르 떠는 허리를 더듬고 가슴을 붙들고
일어서려 한다 한번만 나를 놓아다오
목메이는 겨울산 메아리들을 다 불러
이른 봄날 무수한 나비떼로 날릴 때에
설매화 설움 꽃가지로 나는 나를 찾으리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잠깐만의 사랑 - 서규정


짧디 짧은 넥타이를 매고
기웃기웃 날아다니다 월급날은
잠깐잠깐 사랑할 수 있었다
조퇴 한 번이 까진 이번 달 월급은
고장난 신호등처럼 딱 맞아떨어졌으니
구포 둑을 어슬렁거리면 온다
온다니까 돗자리를 든 늙은 여자가 오면
돌아서고 고무냄새가 나는 여자아이를
슬금슬금 따라가면 된다
얼마냐
있는 대로
만 원짜리 시퍼런 비수 두 자루쯤
옆구리에 쑤시면 영화배우처럼
천천히 쓰러지며 아자씨 노가다지
난 국화야 국제신발 고무공장에 야근을 가야 하지만
이게 편해 노란풍차 아니 풍선껌을 씹어 돌리면 내 나라의
푼돈 좀 쓰면서 흰 눈을 뒤집어 까고 거품을 물고서
올라타면 구포 강 폐수냄새를 풍기며
국화는 곧 떠날 것이라고 을숙도의 병든 철새를 걱정했다
같이 살자고 했다 싫다고 도리질을 쳤다
같이 가자고 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로
구포에서는 월급이 떨어지면 목숨도 떨어지는데
구포역에서 떠날 사랑은
화물곡간차처럼 느리고 길다


 

 

*노동자 계급에서 악필로 써낸 문학적 외곽시가 정감 있는 상식인의 눈에 가시로 남아주기를 은근히 희망한다. 만일 서정성이 바닥이 난 내 시를 고통스럽게 읽고 계신다면 당신께서 깊이 간직한 시심과 서정성을 바닥나게 빌려주실 것을 강요한다. *시집 날개에 실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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