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서를 쓰는 사내 - 김충규

마루안 2018. 3. 15. 21:52



유서를 쓰는 사내 - 김충규



식구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
서재에 희미한 불 켜놓고 유서를 쓰는 사내,
그의 두 눈이 인광처럼 빛나고
창가에 와 머문 달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유족에게 남길 유서를 쓰기 위하여
그는 밤마다 문장을 다듬고 다듬는 것이었으니
혹 그 문장이 미문(美文)이라면
그의 생애는 후회와 죄로 기억되는 일이 더 많다는 뜻
창가의 달이 유일하게 그 문장을 읽고 있으나
입이 없는 달은 세상에 아무 소문도 퍼뜨리지 못하고
문장을 다듬는 그의 손이 간혹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이 있으니
제 생애에서 송두리째 망각하고 싶은 시간이 있다는 뜻
망각은 커녕 그 어느 시간도
생략할 수 없는 생애의 잔인함,
달이 고름 든 제 옆구리를 뜯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
아무도 모르게 유서로 남길 문장을 위하여
몰래 밤을 견디는 사내의
주름 깊은 이마엔 식은땀이 몽글몽글 열린다
그의 사후(死後),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남은 자들은 대체로 망자에 대한 칭송으로 일관하는 법이니
그것이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여기니
유서를 쓰는 일은
얼마나 헛된 욕심인가
이 땅의 숱한 사내들은
유서를 쓰는 대신
밤마다 몰래 제 뼈를 끄집어내
그 뼈에 묘비명을 새기고 있나니
활활 끓는 화덕으로 제 시신 들어가
살이 다 녹고 나면
그의 영혼,
뼈를 움켜쥐고 묘비명을 중얼중얼 읊을 것이니
사내여, 유서 대신
붉은 피 한 점
종이 위에 찍어놓고 가시는 게 어떨지....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실천문학사








아비 - 김충규



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 속에 털어넣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냐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