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친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 김인자

마루안 2018. 3. 14. 23:26



미친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 김인자



미쳔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었지요. 마을 사람들 모두 미친년이라기에 그 여자 이름 미친년인가보다 하고 나도 따라 미친년이라 부르던 한 여자가 있었지요. 읍내에 산 그녀는 비오나 눈오나 내 기억 속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간 마을 해망산 근처 바닷가로 양은 대야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나곤 했지요. 아이들은 심심하면 돌을 던져 그녀를 놀려주었는데 웬만한 일에는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안고 있는 대야를 빼앗을라치면 길길이 날뛰며 반항하던 여자. 어느 날 나는 대야에 든 흰옷들 무엇일까 몹시 궁금했지요. 그날은 누군가 그녀의 목숨 같은 대야를 기어코 빼앗아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비로소 의문이 풀렸지요.


하얀 아기저고리. 늘 같은 일의 반복, 매일 대야에 담아 와 냇가에서 빨곤 했던 그것이 다름 아닌 아기저고리였다는 것. 그날 이후 처음으로 그 여자 이름 미친년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러나 누구도 그 여자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영원히 우리들 마음속 미친년으로 살다 간 그 여자. 어렵게 얻은 아기가 죽어나가자 남편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정신이 돌았다는 소문만 있을 뿐 아무도 그 여자에 대해 몰랐던


왜 나는 지금 뜬금 없이 그 여자 모습 이토록 눈에 선한지요.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그 여자 미칠 수밖에 없었던, 미친년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으로 평생을 산 억장 무너지는 모성애에 함께 돌을 던지던 가슴 비로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시집,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여음








독일영화 - 김인자



독일영화, 매일 같은 영화를 반복해 본다고 하자.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빛 깊은 주인공의 좁은 이마와 어깨에서 무거움 외엔 무엇도 읽을 수가 없다. 머리가 짧은 유태인 남자. 어떤 음향도 배제한 지옥 같은 무거움. 어두운 배경과 절제된 대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낡고 칙칙한 코트를 걸친 사내의 발자국 소리가 가슴을 파고드는 집. 지하로 통하는 구석진 계단 밑 아무 생각도 없이 서 있는 가방 하나. 남자는 가방을 쳐다보며 뭐라 중얼거려 보지만 아주 가끔 어둠 속에서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독백이 무겁고 아프다. 없는 대사를 대신해 내 한숨이 그를 간섭해 보지만 반응이 없다. 불쑥 화면 속으로 들어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지만 언제쯤 남자와 가방이 없어지는지를 지켜보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일상의 우리.


인생은 달콤한 멜러가 아닌 어쩌다 봐도 숨막히는 것을 매일 봐야만 하는 독일영화와 무엇이 다른가.





# 신기하기도 하지.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도 미친년이 하나 있었지. 오래전 기억이라 어디서 오는지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지만 동네 개구쟁이들이 미친년을 놀리고 괴롭힐 때면 동네 어른들이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쳤던 기억이 난다. 독일 영화는 많이 보지 못했지만 프랑스 영화 만큼 지루했던 건 확실하다. 예전에 경복궁 옆 사간동 프랑스 문화원에서 매주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거기서 봤던 독일 영화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잔잔하게 읽히는 산문시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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