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근심의 진화 - 김이하

마루안 2018. 3. 13. 21:02

 

 

근심의 진화 - 김이하


나는 알지 못했다
저까짓 세간살이 하나가 커다란 무덤으로 가슴을 누룰 줄
냉장고며 세탁기며 자잘한 물잔 하나까지도
이제는 버리지 못할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지쳐 가는 줄
그렇게 한 풍경이 되어 있는 줄
나는 몰랐다

갑자기 승냥이 '응앙응앙' 우는 산골이 그리워지는 겨울 밤
온몸이 가려워 오는 열화가 잠의 줄기를 걷어 내고
어쩌면 이렇게 멍해지는 생일까 싶어
울음을 누르고
세상의 처음에 선 듯한 쓸쓸함에
겨를도 없이 앉은 밤

내가 어떻게 왔는가
들여다보자니 기억의 거울은 까맣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길 끝처럼 찰나에 풍경을 버리고
까마득하다, 승냥이 울음에 귀만 먹먹하다
그러다 까무룩 죽어가는 삭정이 하나
눈에 밟힌다

지나간 자국을 남기고 돌아오면
낯익은 세간들만 빼곡히 들어선 어느 자리
비듬을 터는 비루한 짐승 하나
엎드려 있다, 눈이 오려나 보다
오고 있나 보다. 이 세상
발자국 없이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오늘, 그대에게 - 김이하


울먹거리던 마음이
끝내 산을 넘지 못했다
나무 끌텅을 딛기도 전에
새소리에 귀를 내기도 전에
바람에 귀밑털을 날리기도 전에
마음이 뭉텅뭉텅
네 생각에 베이고
우울한 한 생이
끝내 너를 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나는
끌려갔어야 했나
내가 사는 방식으로는
나를 이룰 수 없나
필름처럼 낱장으로 잘린 내 삶이
한 장씩 날아오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저 부호 같은 마음들
그 자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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