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대하여 - 배홍배
먹감나무 꽃이 졌습니다 나무는 이미
어두워졌고
사람의 말로 중얼중얼 더 캄캄해지다가
눈물 같은 까만 열매들을 글썽입니다
말을 더듬는 아이가 나무를 쳐다봅니다
어린 열매 하나가 머뭇머뭇 숨 끝에 끌립니다
순서 없이 몸속의 구멍들이 입 밖으로 막힌
아이의 울음은 나무의 그늘이었을까요
인적처럼 서 있는 늙은 감나무 아래는
오래된 저녁이 인기척으로 오는군요
그렇군요
사람의 흔적과 자리를 바꾸고
사람을 향해 복받쳐 오르는 나무의 나이테
수 십 년이 지나서야
그렁그렁 울음에 닿았군요, 그랬었군요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별어곡역 - 배홍배
빈 대합실에 앉아 있다
의자도, 흔한 사진 한 장 없이 문 하나만으로
한세상인,
휑뎅그렁함이 섭정하는 대합실
매표구가 있던 벽에 벽돌 하나가 튀어나왔다
삐끗한 등허리를 만진다
벽돌을 처음 만졌을,
지금은 흙이 되었을 손바닥의 느낌으로
만진다
팔목이 흐믈흐물해지고 발목이 풀려서
흙먼지 깜깜한 머릿속
문 밖의 벚나무는 몊 개의 꽃잎들을 피워
하얗게 지웠는지
시간표가 텅 비었다
내가 나가야 할 길이므로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세세히 써 넣는다
벽에 빼곡한 낙서들을 뒤적여서
시간표는 꽉 찰 것인지
유리창의 얼룩을 닦아서
세상의 외진 곳을 밝힌 다음에는 등 뒤에서
철길이 어떻게 어두워지는지 적을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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