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예된 시간 - 이해존

마루안 2018. 3. 12. 18:56



유예된 시간 - 이해존



오랫동안 한 사람으로 완성되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찾아올 때, 한 사람을 반성하고 귀에 대고 소문을 얘기한다


결정은 최대한 지연된다 멀리 던져버린 무거운 돌멩이가 나를 끌고 다닌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몸이 한 사람 쪽으로 기운다 이미 결정된 것이 등 뒤의 가시 박힌 담장에서 이뤄진다


소문을 실어 나르는 발자국과 불가능한 것을 기획하는 이마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만 질주한다


오래 세워진 것들이 조금씩 기운다 나를 속이면서 친절해질 때, 아무도 믿지 말라는 귓속말이 더욱 은밀해진다


탁자 위에 놓아둔 서류를 오늘은 읽고 내일은 접고 어제는 찢어버렸다


조금씩 기울면서 무너질 때,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시집,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실천문학








이미테이션 - 이해존



가짜의 전성기가 영정사진으로 걸리고 진짜 이름을 찾았다


무얼 해도 오래된 것 같다는 얘기는 능숙하다는 걸까 식상하다는 걸까
그보다 더 능숙하고 오래된 것을 쫓다가 내 목소리를 잃었다


진품보다 많은 기념품들, 기념품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곳으로 향하고
나는 모니터 속 애인과 기념품이 필요하다


기억력보다 완강한 이미지
두꺼운 입술, 툭 튀어나온 광대뼈, 입 모양과 말투


오늘은 진짜를 능가하는 추모가 이어지고
내가 더 걱정이어서 당신에 대한 걱정이 위로가 되지 못한 나날들


잘 있거라,
오늘은 찬송가 대신 내 망한 노래를
진짜 이름과 망할 놈의 노래를 틀어줘,
누구도 기억 못할 첫 번째 얼굴과 목소리


마지막까지 손에 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대기
그 속에 내 목소리를 끼워줘,


오늘은 어쨌든 죽어서 진짜가 되는 날





# 이해존 시인은 197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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