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늘이 삐딱하다 - 정진혁

마루안 2018. 3. 12. 19:30



그늘이 삐딱하다 - 정진혁



구두 왼쪽 굽이 삐딱하게 닳아 있다
습관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일까


당신과 말할 때 저 너머를 바라본다거나
왼쪽 어금니에 금이 갔다거나
기울어진 울음소리를 좋아한다거나
팬티 속 물건을 왼쪽으로 향하게 한다거나
이런 습관이 내 중심을 기울어지게 하고
이렇게 구두를 왼쪽으로 닳게 한 것인가


그렇게 닳는다는 것은 아주 먼 길을 왔다는 것일 텐데
나는 왜 자꾸만 밖으로만 닳는 걸까


이만하면 세상을 알 만도 할 텐데 싶다가도
조금 더 닳아야 하는
시큼하고 씁쓸한
저 언덕 같은
닳는 맛


구두가 이렇게 닳도록 걸어왔는데
나는 왜 아직도 여기인가
그늘이 삐딱하다



*시집,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현대시학








겨울 강 너머 - 정진혁



한밤이면 언 강은 상처를 내며 울었다
강 건너 불빛이 따스하다
어쩌다 당신이 그리워졌다
강물은 얼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살다보면
강보다 먼저 얼음이 깔리는 가슴에
저 건너 조그만 체온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다
자주 먼 곳을 그리던 눈길이
스무 여드레 캄캄한 달을 밀고 나간다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도처에 숨구멍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미끄러지는 발길에 눈발이 시야를 가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커다란 귀가 거친 숨을 쉬었다
강이 풀리고 나면 다 흘러갈 뿐
서 있지 못 할 몸
강물 속 수초처럼 누워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다
시커먼 아가리는 언제나 내 몸과 함께 살았다
나의 숨구멍을 위해
어쩌다 당신이 그리워졌다
처음 만난 것처럼
어둠이 떨고 있었다






# 정진혁 시인은 1960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공주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쓸쓸한 날에 - 강윤후  (0) 2018.03.13
수목장을 꿈꾸며 - 서상만  (0) 2018.03.13
건널 수 없는 나라 - 최서림  (0) 2018.03.12
유예된 시간 - 이해존  (0) 2018.03.12
그리고 백 년 동안 - 여태천  (0) 2018.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