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고 백 년 동안 - 여태천

마루안 2018. 3. 11. 20:24

 

 

그리고 백 년 동안 - 여태천


횡단보도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우체통 앞에서 안절부절
마음도 함께 점멸한다.
어둠이 번지고 은행나무 아래로
오래전에 지나갔거나 지나가야 할
얼굴들이 쌓인다.
표정을 되찮은 이들은 두 갈래 길로
은행잎이 되어 하나둘 떠났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일은 없을 거다.
마주 보지 못한 사랑은 냄새를 피웠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은
평범한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행의 열매들은
믿음이었다가 두려움이었다가 불안이었다가
결국엔 독이 되었다.
점멸하는 신호등이 모든 기억을 어지럽혔다.

돌아와 우체통에 머물고 있을
어둑어둑한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는 저녁이다.
은행의 열매들이 우는 저녁이다.
누군가 그 마음을 훔치는 저녁이다.


*시집, 스윙, 민음사


 

 



구멍 - 여태천


검은 구멍 속에서의 일이다.
 
셔터를 처음 눌렀을 때
열병을 앓게 한 꽃샘추위가 지나갔다.

시린 손으로
두 번째 셔터를 누르자
거리에 때아닌 폭설이 내렸고
차가운 음식(寒食)으로 하루를 견뎌야만 했다.

세 번째는 으슬으슬 추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같은 구멍 속에서 오래 살았다.

벚나무를 움츠러들게 했던 공기를 뚫고
처음으로 몸에 싹이 돋았다.
간지러웠다.
때마침 한 줄기 비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게 네 번째다.
죽지 말라고
살아 있으라고 내리는 비(穀雨)는 아름다웠다.
비에 목을 맨 것도 처음이었다.

씨를 뿌리고
여름의 끝(夏至)에 도착했을 때
백일몽을 팔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하철에서 여러 이름을 사칭했고
또 누군가는 팔다리가 없어도 잘 기어 다녔다.
버리고 간 신문으로
내일의 날씨와 운세를 읽었다.
하루하루가 비밀스러웠다.

가로수의 벌레 먹은 사과를 따는 동안
여섯, 일곱, 여덟
구멍의 수가 자꾸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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