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극단적인 바람 - 이영광

마루안 2018. 3. 11. 18:17



극단적인 바람 - 이영광



한때는 젊어 전태일이나 게바라 같은 죽임당한 생을 흠모했는데
덜덜 떨던 순수의 시절은 죽고,
전날 밤 술자리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흐리멍덩한 인간 덩어리로 늙고 있다
설사를 내리고 와도 꾸르륵대는 뱃속,
조간은 온통 살인의 추억이다
나의 박해자로서, 나는 결국
망상에 의해 거꾸러지겠지만
인간이란 본래 죽고도 죽이고도 싶어지는 것
때 묻은 동전 쥐고 지하도에 웅크린 인생이나,
한밤중 제가 때려부순 집을 술 깨어 둘러보다
머리 쥐어뜯는 자의 심장은 이미 뭉개져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인간은 죽고도 죽이고도 싶어지고
죽음에도 죽임에도 폭발적인 슬픔의 긴 탄도가 외마디로
뚝뚝 끊어져 있겠지만,
발버둥치는 짐승이 몸속에서 평생을 울었다 한들
결여를 살의로 뽑아내는 건 양아치나 하는 짓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이들은 분노와 절망과 슬픔을,
그리고 위안을 준다
아직은 막장이 아니라는 거
막장이 아니므로, 죽임당한 아픈 생과
죽이고 싸돌아다닌 더 아픈 생 사이 광활한 모래사막을,
어느 극단적인 바람 속을
부유중인가



*이영광 시집, 아픈 천국, 창비








오리무중 - 이영광



세상이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통 모르고 살지만
무언가 쉼없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건
똑똑히 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문자가 오니까


이 정도만 알아도 사는 덴 지장이 없다
태어나고 또 죽어나가는
그 사이는, 원래
오리무중이니까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쪽도 깜깜 오리무중이니까
문자란 게, 워낙 엄지 첫마디처럼
짤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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