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겐 너무 불행한 잠 - 최금진

마루안 2018. 3. 9. 22:23



내겐 너무 불행한 잠 - 최금진



행복한 사람들은 실컷 잠을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퍼질러지게 싸고
맘만 먹으면 잠과 간통하며 잠들 수 있겠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잠은 안 오고
아버지 기일에 지방을 쓰기 위해 일주일은 밤잠 설치며 연습을 했었지
아흐, 내게 귀신처럼 들러붙은 희뿌연 어둠이여
원시부족들에겐 불면증이 없다는데


우주에서 맥주병처럼 빙글빙글 지구가 돌고
사람은 나면서부터
평생 잠의 근처만 기웃거리다 가는데
어쩌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실컷 잠을 먹고
잠을 싸고
잠을 끌어안고 몽정을 하며 뒹굴다가 가겠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평안을 주신다는데
내겐 너무 비싼 평안,
현고학생부군신위,
밤마다 엎드려 비몽사몽 잠을 이마 위에 붙이는 사람
문종이처럼 웅웅거리는 사람


아득히 멀리서 왔다가
내 오랜 편두통만 힐끗 열어보고 가는


내겐 너무
불행한 잠



*최금진 시집, 새들의 역사, 창비








무법자 - 최금진



시장에선 그가 가장 인기가 좋다
그의 연애담과 정치이야기는 기승전결, 같은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붙어먹었다,로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말세라는 식의 결론도 피곤해지면
누운 채로 그는 땅바닥에 판본체로 '밥'이라고 쓴다
그러나 '밥'을 '법'으로 잘못 읽어도 상관없다
그에게 법은 밥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
고성방가에, 노상방뇨에, 무단침입은 밥이 아니라 법에 해당하므로
그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순경에게 질질 끌려간다
모여든 사람들은 까르르 웃는다
살짝만 건드려도 그는 욕설을 법 조항처럼 쏟아낸다
나도 신체의 자유가 있다아, 나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아,
허기의 깡다구다
깡다구의 허기다
그의 비극적인 연애담은
그가 불행한 동안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당분간 그는 시장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이야기는 너무 직설적인 까닭이다


세상에, 연애와 정치를 혼동하다니!
밥과 법을 혼동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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