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력 - 우대식

마루안 2018. 3. 8. 22:34



이력 - 우대식



누가 이력을 묻는다면
내 치욕의 성명서를 보여주겠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었지만
아무도 집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본래의 나는 유령처럼 나타나
가짜의 내가 돌아갈 수 없음을 비웃었지만
나는 크게 결심하였다
나는 간다
내가 도달한 곳이 본래(本來)이다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낯선 두려움에 대한 위로일 뿐
간절함이란 이런 것
한숨 잠이 깨고 나면
달콤한 물을 한 잔 다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실은 팽팽한 활시위에 놓인
내 굴욕의 촉이었음을 고백한다
시위가 끊어지도록 당겼다가 쏘아버린
어느 푸른 창공에서
한 인간의 굴욕이 음각된 것을
선명히 바라보는 삼월의 오전이다



*시집, 설산 국경, 중앙북스








유서(遺書) - 우대식



바람이 분다고 쓴다
바람은 무기질처럼 얼굴을 핥고 지나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흡을 타고 들어와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바람의 후레자식
압록역을 지나며
푸른 강물에 내 모든 것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의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 어느 날 생각하기로 한다
물향기 수목원에서 칼을 든 한 그루 나무를 보았다
어느 순간도 자족하지 않는 자세,
불편함으로 이어가는 삶도 있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각의 힘줄은 거미줄처럼 남아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이를 내 유서라 하자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우나실 모래시계 - 주창윤  (0) 2018.03.08
콩이 구르는 이유 - 김시동  (0) 2018.03.08
칼날, 또 하나의 이력 - 여림  (0) 2018.03.08
오늘의 커피 - 윤성택  (0) 2018.03.08
갈대 - 박수서  (0) 2018.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