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늘의 커피 - 윤성택

마루안 2018. 3. 8. 22:12



오늘의 커피 - 윤성택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기억 저편 - 윤성택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 쌉쌀한 커피가 생각나는 시다. 모든 추억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것이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아름답다
그런 추억일수록
현실을 누추하게 관통해야 한다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죽어가면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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