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칼날, 또 하나의 이력 - 여림

마루안 2018. 3. 8. 22:29



칼날, 또 하나의 이력 - 여림



한 남자가 방안에 있다. 제발
하며 눈을 감는다. 기다릴 사람이
없는데도 남자는 현관문을
열어둔 채이다. 비가 쏟아진다.
사랑이었던 적이 그에게도 있었다.
남자는 창문께로 다가선다.
일순 한손에 쥔 작은 칼날이 일어선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것 또한 이력은 될 수 없으리
남자는 순간
고개를 든다. 한숨이 잘 익은
과육처럼 달디 달다.



*여림 유고전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최측의농간








사막을 낙타가 건너는 법- 여림



끊임없이 걷는다. 복도 이끝에서 저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일정한 보폭으로 사람들 사이를 피해 다니기도 한다.
눈가에 내려선 안경을 한 손으로 치켜 올린다.


어린 왕자의 발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금빛 뱀은 어디 있는 것일까
허물어질 듯한 담장에 걸터앉아 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의 눈물을 생각했었다.
이 몸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어.
섬세하게 찢어지는 선인장 가시에 찔려 가족들의 실핏줄 부분이 엉긴
영사처럼 펼쳐지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뿌리도 없이 내리고
눈내리는 시베리아 벌판
나는 가장 추운 사막길을 걷고 있었다.





# 여림 시인의 시집은 유고시집으로 딱 한 권이 있다. 위의 두 시는 미발표 시로 최측의농간에서 새로 발간한 유고 전집에 실렸다. 그의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어둡고 쓸쓸하고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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