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개의 숲에 머무는 동안 - 박남준

마루안 2018. 3. 8. 21:30



안개의 숲에 머무는 동안 - 박남준



저기까지만
안개의 숲으로 더듬이를 앞세웠다
저 언덕까지만


그 너머는 강력히 뜨겁거나
혹은 강인하여 냉혹한 것들
이마에 흐르던 몽롱한 오후의 햇살은
오랜 꿈으로 인해 차마 눈부셨으리라
안개 너머 보이지 않을까
별빛의 노래를 따라가던 시간
한때 나무의 걸음으로
세상을 읽기도 했다


나는 기억의 퍼즐을 내려놓고
낡은 주머니를 바람에 날린다
자욱한 안개 속에 앉아
옛날과 사랑을 젖은 책장처럼 넘긴다
내려놓거나 또는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였던가
머지않다
고요한 풍경이 가까이 있다

 


*박남준 시집, 중독자, 펄북스








묘비명 - 박남준


 

안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바람 부는 언덕 위 한 그루 나무, 나무의 삶으로 돌아가서 새들의 보금자리와 향기로운 열매, 언젠가는 베어지고 쓰러져 누군가의 언 몸을 덥혀주는 나무처럼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 꽃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새와 나와, 별과 나와, 소나무와 나와, 숟가락과 나와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 인연의 관계 속에서 나는 살았다
내 안의 나이며 내 밖의 나, 내 안의 봄과 겨울의 시간과 비바람의 날들이 있듯이 내 밖에 여름과 가을의 구름과 햇살과 꽃들, 새들의 노래가 있다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내가 곧 자연이며 저 병들어가는 자연이 바로 내 몸의 현재다 나를 부단히 쉬지 않는 강물로 흐르게 하는 일, 바람 부는 광야로 내모는 일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돌아간 이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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