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흰 소 한 마리 구름을 끌고 - 정영

마루안 2018. 3. 6. 22:20



흰 소 한 마리 구름을 끌고 - 정영



전생에 구걸해 얻은 심장을 달고
태어났다


산등성이를 넘는 동안
비명처럼 떨리는 구름들이 몰려오면
손을 쫙 펴서 눈물을 닦고
나무 아래 잠시 쉰다


산문(山門) 아래에선
누가 또 슬픔처럼 스며오는가


법굴엔 빨간 맨드라미 두 송이
일찍 떠난 자들의 선연했던 날들처럼 피었다
저 흩어지는 씨앗들은 얼마나 천진한지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이 가혹할지
구름이 산의 목울대에 걸린다


누가 또 고개 들어 가을볕 속에서 손을 흔드나


새들이 속을 파놓은 보리수엔
어떤 고요의 웅덩이가 있어
거기 쉰 적 없는 발을 담가 쉰 적 없는 숨을 담가
이쯤이면 그만 됐다 구걸해서 얻은 이번 생은
이만하면 됐다 하였으나


식은 살갗을 어루만지며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
미련한 짐승이라 구른 자리를 또 구르며
손을 쫙 펴서 눈물을 닦고
불천지를 걷는다


누가 걸어와 개금도 안 된 불상 옆에 몸을 누인다


절망하기엔 손가락이 너무 많은 짐승이라



*정영 시집, 화류, 문학과지성








간절(間節) - 정영



코를 길게 늘여도 맡아지지 않는 먼 냄새들이 있다
폭설에 오지 않는 새들은 어느 별보다도 멀고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는 날엔 탈골되어 수북한 마음들,
집 밖의 삶이니 뼈를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가장 가까운 별도 사는 동안엔 닿을 수 없다는데
당신 마음을 내 뼈가 삭아갈 때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쁠까 우리 거창한 예식도 없이,
탄생을 칭얼거릴 때 인생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란
노인들의 위로가 나를 풀처럼 가만히 눕혀주었지


같은 바람을 타고서도 서로를 못 알아보는 이번 생엔
숲으로 가 어둠에 몸을 걸친다
이만하면 늙어가는 기술을 하나씩 알아채고 있는 걸까
결국 껑충껑충 뛰어야만 기운이 빠지는 날들,
우린 아이가 아닌 척 애를 써야만 하는 어른들인 거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노래가 뒤섞이는 밤엔
돌아설 때 간혹 보인다 새들이 이번 생에 내린 닻
그 운명의 닻 그 닻의 녹슬음,
살고 있으니 마음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한 나무가 얼룩진 잎을 매달고 천 번의 눈을 맞는 동안
나는 어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침묵하고






# 정영 시인은 1975년 서울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평일의 고해>, <화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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