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 두고 온 저녁 - 김명기

마루안 2018. 3. 5. 19:56



오래 두고 온 저녁 - 김명기



똥탑이란 말 아시는지
나 살던 광산촌 사택은
유안히 짧은 겨울 햇살이
더 이상 산비알 아래로
내려서지 못하면
금세 찾아들던 긴 엄동설한
깨진 유리창 대신 거북선 선명한
비료포대 펄럭이던 겨울 공동변소엔
누군가 가져다 놓은 5파운드 곡괭이 자루
공든 탑을 정성들여 한 층 한 층 밀어 올리듯
아버지 똥 위에 아들 똥이 그 위에 엄마 똥이
차곡차곡 쌓이며 꽁꽁 얼어가던, 그래도
대통령 얼굴 나온 쪽으로 뒤 닦으면 큰일 난다는
아버지 말씀 따라 달빛에 구겨진 신문을 이리저리
비춰 보다 탑의 꼭대기를 가늠해 보다
도저히 더 쌓아 올릴 자신이 없으면
사정없이 곡괭이 자루로 까부수던 저녁
이 땅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탑을 쌓고
부수던 시절, 필요하다면 사람마저도
다 때려 부숴야한다고 그땐 알지 못했던
대통령 긴급조치 몇 호를 기다리며 똥 닦던 저녁



*김명기 시집, 종점식당, 애지








폐광지대 - 김명기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지나온 길 빗금처럼 차창을 스치는 풍경보다
생각이 더 많았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 햇살이
능선 한 자락을 걷어내자
꺾여버린 생가지 축 늘어뜨린 채
반쯤 몸을 접은 설해목 몇 그루


몸뚱이에 꽂힌 튜브로 생을 연명하며
사는 것에 질렸다는 듯 누렇게 말라가던
규폐병동 친구 아버지처럼
나무들도 이내 생장을 멈출 것만 같았다


어둠이 다시 어둠을 덮어버리는 시간 속
빛을 캐러 갔다 끝내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
거대한 무덤 같은 갱도 입구엔 연초록 잎사귀에 밀려난
참꽃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철마다 찾아드는 쓸쓸하고
유일한 조문이었다 떠나기 위해 증오를 키우고
떠날 수 없어 사랑을 키웠던 사람들
얼마나 무모한 저항이거나 절망이었던가


모든 영롱함이 몰락하기 전까지
다만 일용을 위해 악착같았던 날들을
안일한 낭만이 밟고 지나가는 봄날 오후
나 그 증오와 사랑 사이에서 나고 자랐음이 분명한데
저 언덕배기 어디쯤에선가 검은 화차 위로 팔매질하던
하얀 국돌처럼 먼 곳으로부터 그리움하나 챙기지 못하고
최초의 불길(不吉)로부터 도망치듯
이곳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다





# 요 며칠 시집 하나로 신열을 앓는다. 시인이 살았던 탄광촌과 궁핍한 바닷가 비탈에서 자란 나의 고향은 찢어지게도 너무 닮았다. 행여 중독이라도 될까봐 아껴 가며 읽는데도 시집 속에 갇혀 헤어나질 못한다. 고르고 골라서 두 시를 먼저 올린다. 올리고 싶은 시가 너무 많아 줄서기를 해야 할 판이다. 아직 봄 기운은 멀리 있는데 밤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언제쯤 이 시집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올해도 시 읽기의 괴로운 행복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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