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나무가 사는 법 - 양문규

마루안 2018. 3. 4. 09:50



늙은 나무가 사는 법 - 양문규



한겨울 세상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늙은 나무들을 본다


한평생 붙들어 맸던 구름과 바람과 비와 햇살과 안녕
같은 하늘 속에 집이 되고
그늘이 되고
양식이 되던 풀과 꽃과 까치와 다람쥐와 애기벌레들과도 안녕
봄날 한 아름 나무 등걸 속에 움틀 푸른 열기의 유혹마저도 영원히 잠재운 채
안녕, 또 안녕


고래심줄 같은 뿌리가 폭설과 맞닿는 순간
한 생은 극한이면서 또 얼마나 황홀한 사랑인가
서성이는 통곡 대신 허공을 들쳐 메고 가는 하얀 길

 
누구도 나이테에 그려진 죽음을 읽지 못하지만
늙은 나무들은 안다
 

걸으면서 쏴아 센 비바람에 잔가지 몇 개쯤 버리고,
누우면서 거친 눈보라에 굵은 몸 통째로 내려놓으며
저 높은 곳이 언제나 무덤이라는 것을


하늘을 떠가는 늙은 나무들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본다



*시집, 여여하였다, 시와에세이








오십 대 - 양문규



생을 몽땅 강가에 걸어둔 적이 있다


달맞이꽃과 망초꽃이 끝도 없이 피고 지는
젊은 날 강가를 떠돌며 노란 물결 속에 얽히고설켜 한 시절 황홀하게 살던 때가 있다 묻지 마
어느새 옆구리 흰죽만도 못한 꽃잎 닥지닥지 엉겨 붙어 무릎이 아픈
꽃이라고 다 꽃은 아닌 것
그 속내를 더 이상 내게 묻지 마


달과 해를 바꿔가며 웃고 울고 하던 때가 엊그제
소나기 한두 차례 지나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강가를 다녀왔을까
두 송이 꽃이 한 몸으로 뜨는 달과 지는 해를 만져보며
가장 낮은 자리 저보다 훨씬 빛깔 고운 사랑으로 남고 싶은 걸까


버려진 세탁기가 잡풀더미 속에서 생을 탈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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