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벽비는 그치고 - 손병걸

마루안 2018. 3. 2. 20:53



새벽비는 그치고 - 손병걸



시치미 딱 떼듯 말끔해진 골목길
튕겨 오르는 햇볕을 밟고 가다
간밤에 떨어진 눈물이 떠오르는 거야

 
새벽녘, 창문 너머
펑펑 울어대는 하늘에
누구나 그만한 멍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거 아니겠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네 보았거든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한세상 산다는 건
남몰래 흘린 눈물 자국 지우기 위해
딱 그만큼의 햇볕을 만들어 가는 거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한세상 산다는 건
썩지 않을 아픔 하나씩
가슴 속에 꼬옥 끌어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걸음을 내딛는 거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 손병걸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 시인은 사랑을 한 덕에 예쁜 딸을 얻었다. 오직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한 후에 시력을 잃었다. 서른 살에 시각 장애인이 되어 이혼을 했다. 서른 살에 사랑을 잃은 후 점자를 익혀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세 살때부터 엄마 없이 홀로 키운 딸이 이제 성인이 되어 아빠의 눈이 되었다. 딸은 이제 시인의 가장 가까운 친구다.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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