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행에겐 이런 말을 - 이기철

마루안 2018. 3. 1. 09:30



불행에겐 이런 말을 - 이기철



불행도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된다
더운 물로 그의 발을 씻겨 주고 그의 몸을 타월로 닦아 주면
면 내복처럼 유순해진다


한 열흘은 불행하고 단 하루는 행복하자
조금씩 내리는 찬비처럼 내게 오는 불행이여
내 새 옷 한 벌 사 줄게
채소 같은 행복 한 잎만 들고 오면 안 되겠니


지붕에도 장롱에도 책상에도 노트에도 이슬같이 내리는 불행
그러나 내가 그를 찾아가 이마를 짚어 주면
불행도 부츠처럼 편안해진다


나는 서른까지는 불행하고 마흔은 행복하고
쉰은 조금씩 아끼며 불행하고 예순은 조금씩 보태며 행복해지고 싶었다
철조망 안에도 햇볕이 놀듯 활짝 불행을 꽃 피워
행복의 열매를 맺고 싶었다


먼 길 가는 사람은 처음부터 불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와 함께 걷는 신발 소리가 행복을 맞으러 가는 발자국 소리임도 알아야 한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만났고
그와 함께 밥 먹고 그와 잠자면서
마침내 그의 머리카락 냄새와 그의 속옷 냄새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의 뒤를 닦아 주고 그와 입도 맞추었다
불행은 행복의 언니에게 안기면
스스로 행복의 오누이가 될 줄도 안다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내가 만지는 영원 - 이기철



내게 온 하루에게 새 저고리를 갈아입히면
고요의 스란치마에 꽃물이 든다
지금 막 나를 떠난 시간과 지금 막 내게로 오는 시간은
어디서 만나 그 부신 몸을 섞을까
그게 궁금한 풀잎은 귀를 갈고 그걸 아는 돌들은 이마를 반짝인다
염원이야 피는 꽃과 내가 무에 다르랴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겐 배내옷을 지어 놓고 기다린다
한철 소란한 꽃들이 제 무게로 지는 길목에선
불편한 계절이 자꾸 아픈 손을 들어 보인다
저 계절에게 나는 알약 하나도 지어 주지 못했다
내가 만지는 이 유구와 영원은 사전의 말이 아니다
고요가 찾아와 이제 그만 아파도 된다고 위로할 때에야
나는 비로소 찬물처럼 맑아진다
나에게 온 날보다 나에게 오지 않은 날을 위해
서툰 바느질로 나는 깃저고리 한 벌은 더 지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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