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2월과 3월 사이 - 이수익

마루안 2018. 2. 28. 21:18



2월과 3월 사이 - 이수익



2월에서 3월로 가는 길목에
비가
내린다,
하늘이 이 땅에 물을 주고 있다.


갈증 난 블로크담이 비에 젖고
엄동(嚴冬)을 건너온 나무들의 전신이 비에 젖고
눈 비비며 일어서는 먼 바다 물살이
고스란히 그대로 비에 젖는다.


(사람들이 모두 집안에 들어앉은
비 오는 틈을 타
봄은 화약 같은 불씨를 물고
몰래 찾아드는 걸까요?)


아내의 입김에는 지난 겨울보다
한결 따스한 기류가 감돌고
나의 굽었던 관절 마디마디에선
뻐근한 통증이 울리고 있다.


이제 이 비 그치면 실버들 가지엔
초록, 초록, 초록의 새순이 돋고
겨우내 얼음살 박혔던 흙더미 위에서는
부활의 드라마가 시작되겠지.


2월에서 3월로 가는 길목에
비는
내리고,
나는 환상의 물처럼 설레이고 있다.



*시집, 단순한 기쁨, 고려원








한 잔의 기쁨 위에 - 이수익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람같이 언덕을 달리고 싶다.
오오, 환생하는 것들 어리면 어릴수록
약하면 약할수록
나를 더욱 설레이게 하는
만남의 희열이여, 무한 축복이여.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한 잔의 기쁨 위에
또 한 잔의 슬픔처럼.






# 오래 된 시집을 뒤적인다. 1987년에 나온 시집이니 6월 항쟁이 일어난 해로 30년이 지났다. 지금은 없어진 고려원에서 나왔다. 당시는 가장 큰 출판사로 정비석 선생의 손자병법을 TV에서 광고하기도 했다. 감수성 빼어난 이수익 시인은 시어를 치밀하게 배치했음을 느낀다. 20대에 읽었던 시가 50대가 되어서야 눈에 들어오다니 나의 공부는 아직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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