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화상 - 공광규

마루안 2018. 2. 28. 21:36



자화상 - 공광규



밥을 구하러 종각역에 내려 청계천 건너
빌딩숲을 왔다가 갔다가 한 것이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도
도심의 흰 건물처럼 낡고 때가 끼었다
인사동 낙원동 밥집과 술집으로 광화문 찻집으로
이런 심심한 인생에
늘어난 것은 주름과 뱃살과 흰 머리카락이다
남 비위 맞추며 산 것이 반이 넘고
나한테 거짓말한 것이 반이 넘는다
그러니 나는 가짜다 껍데기다
올해 초파일 절에서 오후 내내 마신 막걸리가
엄지발가락에 동풍을 데리고 와
​몸이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제는 사무실 가까이 와 저녁을 먹고 간 딸이
아빠 얼굴이 폼페이 유적 같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똑같다
안구에 건조한 바람이 불고
돋보기가 있어야 읽고 쓰는데 편하다
맑은 날에도 별이 흐리다
눈이 침침한 것은 밖을 보는 것을 적게 하라는
몸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광교 난간에 기대어 청계천을 내려다보는데
얼굴 윤곽이 뭉개진 그림자가
물살에 일그러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시집, 파주에게, 실천문학사








근황 - 공광규



요즘 괄약근이 헐거워졌는지
방귀가 픽픽 자주 샌다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도
사무실이나 젊은 여자들과 둘러앉아 공부하는 동안에도
방귀가 새어 난감하다


어제는 화장실 변기 물을 안 내려
벌써 치매냐고 공격하는 아내와 싸웠다
아내가 아무런 감정 없는 늙은 동창처럼 보인다


오늘은 돋보기를 한참이나
이 방 저 방을 뒤졌다
포기하고서야 머리에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는 시간을 파는 가게가 없다니
이제 나는 끝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