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인질범 - 이영광

마루안 2018. 2. 27. 20:55



인질범 - 이영광



십년을 쓰던 의자를 내다버리는 아침
세상도 버려온 내가 가구 따위를 못 버릴 리 없으니까,
의자를 들고 나가 놓아준다


의자도 버리는 내가,
십년을 의자에 앉아 생각만 했던 사람을
버리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사람도 안고 나가 놓아준다


이것은 너른 바깥에 창살 없는 새 감옥을 마련해주는 일
이제 그만 투항하여
광명 찾자는 일


늙은 의자는 초록 언덕 아래로 실려가고
고운 얼굴, 풍악(風樂)처럼 공중을 날아간다


잘 가라, 탈출이라곤 모르던 인질아
인사하면
잘 있어라, 포기라곤 모르던 인질범
답례하며


사정을 말하자면,
내게는 겨우 새 의자가 하나 생겼을 뿐이나
사정을 숨기자면,
다시, 투항이라곤 모르는 인질범이 되었을 뿐이나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