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 한석호

마루안 2018. 2. 26. 22:50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 한석호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 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立冬)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사라져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시집, 이슬의 지문, 천년의시작








그늘의 정원 - 한석호



맨 처음의 발음과 맨 나중의 바람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혀의 은유 같은 것,
바람은 고요의 등에 그늘을 음각하고
바싹 야윈 풍향계가
사제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늙은 선인장과 악수하는
밀짚모자, 매우 짜고 달고 쓰린 기억으로 직조한
근엄은 그늘의 다른 이름.
담보할 수 없는 생의 뒤편에서
누군가는 찾아올 사랑을 예비하고
누군가는 흔적만 남은 사랑조차 닦아 낸다.
눅눅하고 어둔 메타포들.
하이에나가 물고 간 그늘의 배후에서
바람이 휘몰이로 일어서고 있다.
맨 처음의 모든 나와
맨 처음의 모든 너는
그늘이었다는 의문을 긍정하기로 한다.
나날의 이면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또 신산한 울음 정원 곳곳에 터뜨리고 있으므로





# 한석호 시인은 1958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슬의 지문>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