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우 존재하는 것들 - 김유석

마루안 2018. 2. 25. 18:55



겨우 존재하는 것들 - 김유석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는 말, 실은
꼴뚜기가 꾸민 얘기다.


부릅뜬 동태의 눈
눈을 한쪽으로 몰아 째리는 가자미 틈새
막돼먹은 듯한 처지를 감당해야 하는 슬픔


오징어 일족으로 치자니 주워 온 자식 같고
한치 새끼라 하면 한 치 앞도 모르고 꼴값 떠는 것 같아


장날마다 나는 것도 아닌 것이
덤으로 딸려가고
뼈대 없는 무른 살집
소금에나 절여 곰삭은 슬픔을 경배하면서


점잖은 생선들 망신시키는 일보다
기품 있게 거드는 고육(苦肉)에 이르러
어물전 한구석을 차지한 족속



*시집, 놀이의 방식, 문학의전당








먹이 - 김유석



나의 기다림은 실잠자리가 걸려들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줄을 치고 웅크리는 일을 함정이라 이르지 마시길,
기다림이라는 생의 누명을 쓴 채
공중에 짓는 집은 적소(謫所)와 같아
흔들리는 과녁 한가운데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보는 버릇이 있을 뿐
늙은 탁발승보다 적막한 족속인 나는
저대로 날아다니는 것들에게 관심이 없다.
막연함은 기다림이 아닐 것이므로


실잠자리가 걸려들 때, 정확히
실잠자리의 겹눈들이 몽롱해지기 시작할 때
나의 몸통은 서시히 부풀어 오른다. 실잠자리의 생김새나 때깔
날개에 붙어 파닥거리는 공중은 안중에도 없고, 가령
길을 헛짚었다는 투로 자학하는 실잠자리의
그 헛짚은 길이 배고픔처럼 찾아들 때, 그러나
몸부림치는 것들은 아직 먹이가 아니므로


나는 거미줄로 실잠자리의 고통만을 빨아들인다.
곱고 섬세한 날개의 무늬 속에서
가볍게 털던 허공이
줄을 흔들며 내 몸통에 빨려든다. 흔들어댈수록
본능만 남기고 유탈해버리는 실잠자리 미망들


나는 좀 더 기다린다.
파닥거림 끝에 오는 실잠자리의 전율
날아다닐 땐 느낄 수 없었던 그 미세한 떨림을 맛보기 위해,
그러고 나서 오는 배고픔은 무의식의 감각일 뿐, 나는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 채
기다림이라는 이미 죽은 몸부림을 먹기 시작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는 용접이 필요하다 - 박순호  (0) 2018.02.26
충무로에 갇히다 - 김태완  (0) 2018.02.26
주저흔 - 박성준  (0) 2018.02.25
내일의 펀치- 오민석  (0) 2018.02.25
감쪽같이 실패하는 법 - 박세현  (0) 2018.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