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일의 펀치- 오민석

마루안 2018. 2. 25. 11:15



내일의 펀치- 오민석



자전거를 탄 소년이
별촌리 바닷가를 지난다
몸통 가득 햇살인 아이 때문에
바다는 퍼렇게 멍들어 있다
생(生)이 벌써 배경으로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꽃이 다시 피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도 얻어터지니
어디가 끝인 줄 모르겠다
철모르고 피어난 동백꽃처럼
언젠가 쌍코피 터뜨리며
링에서 쓰러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생은 더디도록 더디어서
나는 얻어터지며 견디는 수밖에 없다
모든 주먹은 내가 만든 것
내일의 펀치를 두려워하는 것도 죄다
아이는 간 데 없고
배경도 없이 꽃이 지니
서러워 말 일이다
봄은 멀고
나는 이미 벌 받고 있다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낙타의 꿈 - 오민석



오늘은 하루 종일 바람이 불었고
바람의 끝은 칼날처럼 매서웠네
결빙의 강을 건너는 낙타여
나는 성스러울 것 하나 없이
종로5가를 걷다가 인사동에 들어가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었네
막걸리 자국 쓸쓸한 노인들 몇이
파고다공원 담벼락에 비둘기처럼 모여 있었네
낙원상가에 노을이 확 불붙는 순간
아직 싸지르지 못한 몸의 찌꺼기들
다 태워버리고 싶었네
영혼만 순결하게 남아
사막을 건너고 싶었네
술 없이 술의 혈관을 통과하기
밤의 등불 속에 몰래 외투를 버리고
주마등처럼 현세(現世)를 탈출하기
그러나 참담한 꿈처럼 버스가 오고
나는 5500번 좌석버스에 앉아
가래 끓는 소리로 낙타가 우는 것을 들었네
낮은 곳에 밑금을 치는 생이여
먼 곳에서 우레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발이여
내 혈관은 하수구처럼 세상의 바닥을 흐르니
슬픈 신호로 위로하기 없기
나는 마침내 상현동 성원3차아파트 xxx동 xxx호로 깃들 것이니
그곳에서 어린 가족들과 성스러운 밥을 나누고
이승의 피로한 잠을 자야지
꿈속에서 혹시 동행하는 짐승이 있거든
눈 비비며 또 먼 산을 가리켜야지





# 봄이 코앞인데 꽃샘추위는 물러갈 줄 모른다. 시인은 1992년에 첫 시집을 내고 23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이란다. 시집을 남발하는 시대에 긴 시간 잘 숙성시킨 시들이 적당히 마음을 울린다. 첫 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잠시 모래무덤에 중독되었으나
고사리처럼 손 내미니
시간의 버스여, 나를 다시 태워다오
흰 고래 타고 산티아고를 한 달쯤 걸어
당신을 만나고 싶다
다 해진 신발 보여주며
평온해진 풀밭에
길 아닌 길들을 풀어줄게
.
.
.
23년 만에 다시 고원(高原)에 이르다.
벗들, 여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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