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쪽같이 실패하는 법 - 박세현

마루안 2018. 2. 25. 09:42



감쪽같이 실패하는 법 - 박세현



세상에 와서 이렇다 할 명예를 모은 것도 아니고
떵떵거릴 돈을 모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라면
이거, 실패한 것 아닌가
국회의원이 되어서 세금을 축내지도 못하고
강남구에 살아보지도 못했다면 실패한 삶이 아닌가
시집이나 그 주변 나부랭이나 읽으면서
재즈도 아니고 재즈북이나 뒤지는 삶은 실패한 게 맞다
1960년대 후반 피트 라로카는 재즈락 열풍이 불자
음악계를 은퇴하고 택시운전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
그 돈으로 뉴욕대 법학과에 진학하여 훗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다시 음악계에 복귀한다
시인으로 치면 절필이 되겠는데
성공하는 삶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패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문제는
반쪽짜리 실패가 아니라 완전하게 감쪽같이 실패하는
방법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배워 두어야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 숨소리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황홀한 성공이라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때는 늦었다 툭하면 인터넷 구석에서 끌려나오는 삶은
적어도 내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리라
저걸 어떻게 싹 지우느냐



*박세현 시집, 헌정, 시로여는세상








좀 다른 당신 - 박세현



늦은 나이에 과객에게 꼬불쳐 두었던 공간을 보여주었던 사람
그게 당신이라면 받아들이실까
가령, 부처님 오신 날
그날은 부처님 떠나신 날도 되겠고 이팝꽃 제대로 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가령 안티구아 같은 것
식은 커피를 한 잔 더 저 밑으로 퍼붓고 길을 나서면서
이 나이에 좋아하고 말 것이 있다는 게 우습다고 대답헸는데
당신의 표정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쨌거나
나는 삼층석탑보다 그 옆에서 놀고 있는 공터를 추구하는 종류다


바람도 좀 불었고, 5월의 시계도 부지런히 흘러갔으나
우리가 죽어 손잡고 싶어 손 뻗었으나 잡을 손이 없을 때
내 무념무상의 카르마를 용서하실 것
앞에서 가령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누구나 아끼고 싶은
숙녀의 필명이자 환상이다 나보다 누구보다 좀 다른 당신에게
셀로니오스 멍크처럼 말하고 싶은 날 다가온다 다가오시게
-삶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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