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주인공이다 - 이병승

마루안 2018. 2. 22. 20:35



나는 주인공이다 - 이병승



얼마 전 나는, 내가 어떤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아주길, 그냥 그런 거니까
주연은 아니고 조연인데
우울증에 사변적인 글쟁이 기질을 타고난 아웃사이더로
그다지 성공적인 인생은 못되는 캐릭터다
작가는 등장인물에게 고난과 역경 난관을 많이, 세게, 가혹하게 주면 줄수록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허구한 날 내 인생엔 to be continue가 붙는 일이 많고
폼나야 할 상황에 구차하고, 비굴하고, 얻어터지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하도 피곤하고 창피해서 작가에게 항의를 했지만 늘 무시당하기 일쑤여서
얼마 전부터 나는 작심하고 작가에게 반항을 시작했다
주어진 성격을 바꾸고 고난이 와도 척척 해결하고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다른 길로 냅다 달리기도 하고,
결국 당황한 작가가 내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었다


오늘부터 내가
주인공이다!



*시집,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실천문학사








사랑 - 이병승



모든 극단에는
숨은 미래가 있다, 생의 유혹 같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애인을 잊을 수 없었던 안나 치코바는 8톤 트럭을 몰고 교도소 담벼락을 들이박았다 벽에 구멍을 뚫고 처박힌 트럭 안에서 그녀는 즉사했다 부서진 차 안에는 와인 한 병과 담배 그리고 콘돔이 흩어져 있었다


사랑의 종신형이 이와 같다면
부서져서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봤던 영화 목록을 떠올렸다. 아팠던 사랑이 얼마나 많았던가. 마음에 남은 장면들을 기억해낸다. 근래에 이처럼 강렬하게 박힌 시가 있었을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질 못했기에 더욱 그렇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취 - 김성규  (0) 2018.02.23
곧, 사과 - 서규정  (0) 2018.02.22
그리운 내일 - 이문재  (0) 2018.02.22
무화과나무 - 배홍배  (0) 2018.02.21
저녁 시간의 의자 - 황학주  (0) 20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