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 배홍배
꽃 피워본 적 없는 나무에 일몰 걸릴 때
마른 가지에도 별자리끼리 얽히는,
잎보다 많은 아버지의 밤들은 피어났다
별자리에 숨겨진 운명을 읽어내느라
얼굴 밖까지 흘러내리는 눈,
아버지의 눈물과 마주쳤을 때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손바닥 위로 발돋움을 하고
나뭇잎을 닮아가는 손금대로
운명을 기다리는 꿈속 한 자리
고개 저으며
아버지가 올려다보던 높이에서
걸음마 배우고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고목 - 배홍배
남평역에 저녁이 옵니다
늙은 벚나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오래된 저녁은 천천히 옵니다
그 옛날 리어카에 실려나간 사람이
나무 아래서 몸속으로 흘려보냈을
숨 가쁜 하늘도
저 구멍을 지나왔을까요
숨 끝에 밀린 목구멍은
빈 소주병 안에 아직 고여 있는 것일까요
몸 밖으로 아무렇게나 뚫린 구멍에서도
한 방울의 하늘은 쉼 없이 흘러나옵니다
나무도 몇 십 년을 한 자리에 서 있으면
외로움을 아나 봅니다
제 몸을 쥐어짜서 이슬에 젖는 가지,
눈물 흐르는 뺨 그 빛깔 그대로
사람의 핏줄을 돌아
취한 일몰은 한밤중에 꽃으로 핍니다
움직이면 한 귀퉁이씩 사라지는
사람의 자리, 그때마다
넓어지는 나무의 구멍 속을 마냥
비워두는 달빛 말고는 달리
섭섭해 할 게 없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시인의 말
유년 시절, 말보다 먼저 배운 것은
십리 바다에서 뜨는 해의
그림자가 가르쳐 준 고독이었다.
고독을 따라 첫사랑은
일찍 찾아 주었고
쪽빛 고독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 첫사랑도 떠나갔다.
속이 빈 그림자 안에서
버티고 선 한나절은
가련한 해가 뜨고 졌고
어스름은 오래된 저녁을
거스르기 일쑤여서
우리 집 처마 밑엔 하루가 어눌했다.
그 하루에도
수 십 년은 닳아 아직
다 배우지 못한 말을 고독에게 더듬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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