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화과나무 - 배홍배

마루안 2018. 2. 21. 23:32

 

 

무화과나무 - 배홍배


꽃 피워본 적 없는 나무에 일몰 걸릴 때

마른 가지에도 별자리끼리 얽히는,
잎보다 많은 아버지의 밤들은 피어났다

별자리에 숨겨진 운명을 읽어내느라
얼굴 밖까지 흘러내리는 눈,
아버지의 눈물과 마주쳤을 때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손바닥 위로 발돋움을 하고
나뭇잎을 닮아가는 손금대로
운명을 기다리는 꿈속 한 자리
고개 저으며
아버지가 올려다보던 높이에서
걸음마 배우고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고목 - 배홍배

 

 

남평역에 저녁이 옵니다

늙은 벚나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오래된 저녁은 천천히 옵니다

 

그 옛날 리어카에 실려나간 사람이

나무 아래서 몸속으로 흘려보냈을

숨 가쁜 하늘도

저 구멍을 지나왔을까요

숨 끝에 밀린 목구멍은

빈 소주병 안에 아직 고여 있는 것일까요

 

몸 밖으로 아무렇게나 뚫린 구멍에서도

한 방울의 하늘은 쉼 없이 흘러나옵니다

 

나무도 몇 십 년을 한 자리에 서 있으면

외로움을 아나 봅니다

제 몸을 쥐어짜서 이슬에 젖는 가지,

눈물 흐르는 뺨 그 빛깔 그대로

사람의 핏줄을 돌아

취한 일몰은 한밤중에 꽃으로 핍니다

 

움직이면 한 귀퉁이씩 사라지는

사람의 자리, 그때마다

넓어지는 나무의 구멍 속을 마냥

비워두는 달빛 말고는 달리

섭섭해 할 게 없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시인의 말

 

유년 시절, 말보다 먼저 배운 것은

십리 바다에서 뜨는 해의

그림자가 가르쳐 준 고독이었다.

고독을 따라 첫사랑은

일찍 찾아 주었고

쪽빛 고독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 첫사랑도 떠나갔다.

 

속이 빈 그림자 안에서

버티고 선 한나절은

가련한 해가 뜨고 졌고

어스름은 오래된 저녁을

거스르기 일쑤여서

우리 집 처마 밑엔 하루가 어눌했다.

그 하루에도

수 십 년은 닳아 아직

다 배우지 못한 말을 고독에게 더듬거린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주인공이다 - 이병승  (0) 2018.02.22
그리운 내일 - 이문재  (0) 2018.02.22
저녁 시간의 의자 - 황학주  (0) 2018.02.21
혼자 하는 일에 - 강영환  (0) 2018.02.21
명왕성에 가고 싶다 - 정호승   (0) 20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