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내일 - 이문재

마루안 2018. 2. 22. 19:30



그리운 내일 - 이문재
-터진 상처를 아물게 하는 머큐로크롬은
 더 오래 살갗에 남게 마련이다



기다림으로 오늘을 지운다
어두운 상점의 거리를 지나와
폐활량을 꺼내보면, 아, 숨이
차다 땅 위엔 바리케이트
하늘엔 서치라이트


그리운 내일,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정오에, 이렇게 중얼거린다 너와
나 사이에는 왜 아예 원근법이 없었을까
무턱대고 믿었던 걸까
포도송이처럼 싱싱한 허파도 있다던데


서편의 산, 키 큰 건물들
파랗게 날 선 스카이라인을 노을에다
칼질한다 돌아갈 곳,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나온 것처럼
불안해도 돌아갈 수 없는


여기서 죽으면
학적부의 증명사진을 확대해
영안실에 세워놓을까, 후후 웃음도 잘못
삼키면 속이 쓰리다, 잘못
오른발로 밟는 행진곡이 큰 북소리처럼
낙엽을 밟는다


기다림으로 내일을 지운다
꾀죄죄한 폐활량을 외투로 껴안으며
잠드는 밤, 뽑아 지붕에 던진 앞니처럼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지리산을,
모질다는 내 왼손의 손금처럼
들여다 본다, 피아골, 뱀사골로 넘어가는
밤길처럼, 운명선은 가파르다


밤하늘, 쓰러진 서울의 잠 위로 성욕보다 빳빳한
저 서치라이트의 불빛, 빛들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민음사








검은 돛배 - 이문재



나의 무덤은 커야 한다


종소리는 적벽에 부딪혀 금이 간다
마른 어깨에 실려 있는 마른 저녁
길에서 죽지 못한 도보고행승은 아름답다
먼지 나는 길에 떠 있는 돛배
아지랑이라도 지나가는가


오늘도 사랑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간다
나는 무덤이라도 큰 것으로 가져야지
봄 언덕 종다리와 보리의 뿌리들이
흙을 곱게 만들고


저렇게 금 간 종소리는 어디로 가 쌓이는지
언제쯤 부서진 것인지
적벽은 붉구나


나는 무덤이라도 커야 한다
무덤 하나라도 검은 나를 힘껏 껴안아주어야 한다
마른 봄 아침 길
아 이슬 맞은 어린 진달래라도 미친 듯 씹으며


길 위에서 죽지 않을
도보고행승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녁 적벽으로 걸어가는 종소리
붉구나 너무나 붉구나






# 어영부영 하다가 벌써 올해도 두 달이 지나간다. 다짐과 후회의 반복이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나에겐 날마다 새날이고 그리운 내일이다. 봄이 되면 지리산에 올라 며칠 있다 와야겠다. 거기서도 다짐과 후회는 계속 되겠지만,,,,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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