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활의 달인 - 김지명

마루안 2018. 2. 20. 22:41



생활의 달인 - 김지명



꽃차례 올라 꿀통에 빠진 적 있다
이마에 주홍 글씨 같은 주름이 생겨
새 혐의가 있는 꿈 높이 구두로 갈아 신었다


거미는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는다 주저앉은 지붕의 표정을 손질하지도 않는다 삐걱거리는 계단에 서서 새집 다리를 놓는다 널뛰기 좋은 전망이거나 좀 후미지면 좋아 종종 명암이 분명하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나무 쪽으로 거미줄을 쏜다 실낱이 뚝 떨어져 공중그네를 타고 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 소신은 바람을 길러 어지러운 전선이 우는 골목은 흔들려


전선을 잇는 손이 보인다 전압을 올려 끊어진 시간을 달구는 새라고 할까 가벼운 심장은 중력을 몰라 허공을 파서 불꽃을 산란한다 황혼 녘으로 걸어간 둥근 등이다 위험 금지 팻말이 구름을 올라타고 있다 따끈한 밥상은 고압선 너머에 있다 마른침을 삼킨 태양도 하애졌을 거다 죽음이 씹히는 길 끝에는 날개 접은 새가 흔들려


무너져도 바람을 모시며 살고 있다 거미는 마니차 경전을 돌리듯 방적기 돌려 주문을 완성한다 어림수 놓아 유랑하는 일가의 치기까지 그물코 셈을 놓는다 느려도 지치지 않고 구름과자를 기대해 하늘만 보고 뛰어오른 약시와 천방지축 나대는 어린 것들 덩치 믿고 덤비는 어리석은 것들과 별을 보며 통화하고 싶다


거미는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는다
어제의 본분을 줄타기쯤으로 던져둔
쓸쓸한 표정은 적기를 안다
맨손으로 게르를 짓는 유목의 영혼이 이럴까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 천년의시작








유유상회 - 김지명



모과는 달
아픔은 새의 발자국


어떻게 꼿꼿이 서 있을 수 있겠니
이 방은 무겁고 저 방은 시끄럽고 그 방은 냄새나고


흰 가운 입은 그는
그래도 아픔은 주관적이라고 말하지


머릿속이 해진 벌집 같아도 되는 걸까
조잘대는 동화책과 실로폰을 숨긴 세탁기
정신 나간 가방과 샴푸를 보관한 냉장고
죽은 시계와 스탠드가 사는 다락방


모과나무에 앉은 달이 육즙을 내리는


방, 방 젖은 시간을 말리는 밀납초가 타고 있다
뿌예진 추억을 붉은 혀가 따라가고 있다
깨진 말이 더듬거리는
마포에 싸인 미몽을 모두 내다 버려야겠다
아무에게도 움트지 않도록 기억을 흘려보내야겠다


모과나무 아래 사는 새들이 쪼아 댄
머리가 아파요


골목 끝에 열린
먼지로 봉인된 누상 가옥들에
오렌지등을 넣어 둔다면
나는
당신을 꺼내 사용할 첫 사람이 될까


달의 주문에 모과들이 함부로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안녕? 초인종을 누르지 마세요





# 김지명 시인은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인하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과기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과를 수료했다. 201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가 첫 시집이다. 자신의 색깔이 확실한 시를 쓰는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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