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낯선 외로움 - 황동규

마루안 2018. 2. 19. 18:50



낯선 외로움 - 황동규



저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다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쬐그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들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시집,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대상포진 - 황동규



병 이름 제때 몰라 아픈 왼팔 접지도 못하고,
십 년 전 가출했다 탕자로 돌아온 오십견이군!
할 수 없이 다시 데리고 살 준비를 하는데,
잠자다 아파 깨어 울음 참고 눈물 쏟는 사이
가구들이 뒤로 물러서고
개나리 지고 벚꽃 피고
라일락이 가쁜 숨을 내쉴 때
불현듯 대상포진이라는 옛 진법(陳法)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
병원에 다니며 다시 사흘 밤을 눈물 흘리며 잠을 설친다.
아파트 영산홍이 피고
산책길 뙈기밭 가에 꽂혀 녹슬던 가시투성이 막대들이
연초록 두릅 순을 피우고 있었다.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찢으며 피우고 있었다.
아 또 한 번의 삶!


온몸의 피가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틈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꾼 아침,
가구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천천히 대면하는 햇빛!
나에게서 해방된 고통, 그 눈물 삼킨 밤들은 어디로 갔는가?
몸이 괴괴하다.





# 오십대가 되니 낯선 외로움이 자주 찾아온다. 비주류 삶에서 외로움은 필수적인 동반자다. 낯선 병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순서 대로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폐차가 가까운 자동차일수록 고장이 잦은 법이다. 너무 낯선 병이기에 나는 비켜갈 거라 생각했던 대상포진을 앓고 나니 알겠다. 시인의 체험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럴 때는 개도 안 물어갈 나이가 벼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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