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독사, 혹은 과로사 - 홍신선

마루안 2018. 2. 19. 19:39

 

 

고독사, 혹은 과로사 - 홍신선


혼자 오래 견디는 외로움도 너무 지나치면 과로 아닐까
때 이른 소한 추위 속 세상 뜬 독거 할멈,
고독사일까 과로사일까

반쯤 타다 꺼진 연탄 서너 장 나뒹구는 쪽방 앞엔
늙은 한 마리 반려견이 헌 박스나 폐지 틈에 매어있었다는데
판독용 엑스레이 필름처럼 생전엔
비닐가림막 청테이프로 누덕누덕 덧붙인
극빈의 깊숙한 내부나
둘은 사이좋게 들여다 보았다는데
알아듣는 말귀 몇 마디엔 말귀를 뚫어
종신(終身)토록 목줄처럼 서로를 서로에게 걸고 살았다는데
그게 옛 창가(娼街)의 비좁은 골목 맴돌며 낑낑대며
애완용 왕따의 나날들을 헤매던
둘만의 필살기였다는데
혼자 견디는 고독력도 너무 오래 된힘 쓰다보면
못 버텨 낼 과로란 듯 훌훌 털어낸
이제 뭇 지각 모두 꺼버린 주인의 긴 잠속에
끝내 뒷갈무리 안 된
쪽방 문밖 홀로 유기된 저 뱃구레 퀭한 개 한 마리
하루 열흘 언제까지나 또 하늘바라기로 지켜 서서 기다리겠다,
오늘은 풀어 놓고 간 목줄 한토막이
새삼 낮은 허공 이마받이 피하듯 남산 뒤로 멀리 떠 흐르는데.

 

 

*시집, 삶의 옹이, 문학선社

 

 

 

 

 

 

겨울 비둘기  - 홍신선

 

 

이 겨울 노숙(露宿)한 날개죽지 밑에 극심한 허기들을 감추고

막 뿌려준 급식 앞에 모여든 비둘기들 같다

무료급식차 배식줄에 선 결식노인들

몇몇은 벌써 둥근 긴이식탁에 뿔뿔이 그러나 둘러앉아

국밥들을 먹고

몇몇은 더운 입김 내뿜으며 후식용 종이컵커피를 마신다.

저 퇴화한 침묵의 새들이 빙 둘러와 내린

신관 주민센터 뒤쪽 구석진 하늘에는

웬 무덤처럼 구덩이 구덩이 구름들이 패여 있다.

마침내 구청 사회복지관 밥차가 떠나고

스텐그릇 쇠비린내도 국밥도 아예 없는

언제인가는 저 구름구덩이 속으로 또 몇몇 비둘기가 편안히 스며들까

그렇게 무의탁 구인류들 떠난 빈 식탁과 의자들에

이번엔 거기

수많은 내가 대신 둘러앉아 그러나 뿔뿔이

몇 숟갈 생각을 뒤적이다보면

아버지의 죽기 전 단지 미안하다던 외마디 귀엣말이 

먹다 흘린 국밥알처럼 흩어져 으깨졌다.

 

지난날 책가방에 넣고 다니던 무거운 현실을

몇 권째 벗어던진 홀가분한

나의 어깨가 이즘 척추측만으로 비스듬 자꾸 기울어져 간다,

한 쪽 치올라간 어깨엔

여전히 마지막 숙제처럼 생활이 가볍게 얹히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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