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낯선 곳에서, 낯선 - 김정수

마루안 2018. 2. 18. 19:59

 

 

낯선 곳에서, 낯선 - 김정수

 

 

내 방 동쪽에

조그만 창문 하나 나 있고 햇살은

물 속의 유리막대처럼

휘어져 들어온다 나도 투명하게 휘어져 있다

늦은 아침

길게 연기를 매단 산 아래의 굴뚝들

집 한 채씩 소유하고 있다

늦게 싹을 틔운 나도

미끈한 굴뚝 소유하고 싶었지만

비탈진 골목 벗어나기도 전에

자빠지곤 했다

산 위에서 시작한 삶은

산 위에 머물렀다 산 아래서 시작한 삶도

한 번 올라오면

물처럼 밑으로 흐를 수 없었다

저기 또, 뿌리 잘린 사람들

무리 지어 올라온다

몇 번 자빠진 후에야

비탈진 길에 익숙해지리라

하늘을 다 가진 창문으로

햇살이 휘어져 들어오고 오늘도

죽어야 산 위에 오르는 무리 속으로 향한다

 

 

*시집, 서랍 속의 사막, 리토피아

 

 

 

 

 

 

목수 - 김정수

 

 

그는 목수였다. 60평생

60십 채가 훨씬 넘는 집을 지었지만

살아생전 문패 한번 번듯하게 달아보지 못했다.

집안의 대들보가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남의 집 기둥만 세우고 다녔다. 그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대가족이라 다 모인 적이 드물었다.

다 모여도 댓돌에 신발들 나란히 한 날보다

추녀 밑을 서성댄 날들이 더 많았다.

한여름에도 무서리가 내렸다. 가족의 생계가 대팻날

속으로 들락거렸다.

늘 하늘 가까운 동네를 맴돌았다. 금방 내려올 것이라고, 조금만

조금만 참으라고 가족을 달랬지만

가난에 붙잡힌 발목은 쉽게 풀려나질 않았다. 한번은

그가 지은 집 건넌방에 세 들어 살았다.

목청 큰 막내의 울음은 얇은 벽 안쪽에 머물 정도로 낮아졌다.

웃음도 소리 없이 입 속에 머물렀다. 웃음 끝에서

침이 말랐다. 허리는 대팻밥처럼 숙여졌다.

해종일 일을 해도

새우깡 한 봉지 사들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가 지은 집이 늘어갈수록 근심의

나이테는 왜 자꾸 늘어만 가는지, 톱밥 같은 별빛

또박, 또박, 밟고 집에 들어오면

새우 같은 자식들은 빌 디딜 틈 없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천장에서 쥐가 전쟁을 벌여도 고단한 방은

일어날 줄 몰랐다. 꽃무늬는 쥐 오줌에 물들어 있었다.

쥐 오줌에 물든 판잣집도 그의 손길이 한번 스치면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되고 구중궁궐이 됐다. 그러나

집안은 폐가처럼 무너져갔다.

그의 목수였다 살아생전 목관(木棺)만한 방조차 장만하지 못한.

 

 

 

 

*자서

 

아침밥을 너무 늦게 먹었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보다 많이 늦었다.

늦은 만큼

찬이 많이 식었다.

밥을 꼭꼭 씹어 먹느라 늦은 게 아니라 그런지

아쉬움도 크다.

 

상을 물리기도 전에 허기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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