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외로움에 대한 짧은 생각 - 허장무

마루안 2018. 2. 18. 19:05



외로움에 대한 짧은 생각 - 허장무



어느 날 사방은 고요해지고
불현듯 등 돌리는 세상이 쓸쓸해서
홀로 기척 없이 가라앉아 외로워질 때
차마 외롭다고 말하지 마렴,
날이 가고 해가 쌓이면서
외로움이 말갛게 차오르고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내도
말하지 마렴, 외로움이
뿌리가 돋고 줄기가 뻗어
앙증맞은 잎새로 돋아나도
말하지 마렴,
가슴 속에 묻었던 외로움이
붉은 꽃잎을 토해낸다 해도
말하지 마렴, 그 외로움이
가을 햇볕에 과실로 익어서
은근한 향기로 돌아다녀도
말하지 마렴, 외로움의 씨앗이
길을 가던 철새의 속내를 거쳐서
양지 바른 들녘을 떠도는
안존한 바람쯤으로 떨궈진대도
말하지 마렴, 차마 말하지 마렴,
고요를 말하면 이미 고요가 깨지듯이
외로움이 말하면 이미 외로움이 아니니
많은 열매가 다시 꽃으로 환생할 때까지
외로움의 연기(緣起)를 깨달을 때까지
그때 가서 말해도
외로움은 결코 늦지 않으리니.



*시집, 밀물 든 자리, 문학과경계








슬픔으로 아름다운 세상 - 허장무



낙엽 지는 슬픈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낙엽에게 그 슬픔 다 말하지 못하고
낙엽 속에 사각사각 슬픔 묻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 슬픈 사람은 안다
슬픔이 하늘하늘 나뭇가지에 매달려
슬픔으로 맑은 영혼 가을처럼 깊어갈 때
낙엽 속을 슬픔으로 걸어본 사람은 안다
옷깃을 툭툭 치며 낙엽이 흩어질 때
슬픔이 단풍들듯 가슴에 밀물지는
슬픔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안다.


눈 나리는 슬픈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눈에게 그 슬픔 다 말하지 못하고
눈 속에 소복소복 슬픔 묻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 슬픈 사람은 안다
슬픔이 새록새록 눈꽃으로 피어나
슬픔으로 맑은 영혼 눈꽃처럼 눈부실 때
눈 속을 슬픔으로 걸어본 사람은 안다
푸른 솔 툭툭 치며 함박눈이 나릴 때
슬픔이 보석처럼 가슴에 밀물지는
슬픔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안다.






# 10여년 전에 나온 시인은 시집의 들춘다. 시인의 말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가슴 속에 하얀 슬픔을 안고 사는 시인은 칠순 고개를 어떻게 넘었을까. 천상 그는 시인이다.


*시인의 말


두 번째 시집을 내는 데 이순(耳順)의 문턱에 닿았다
다시 또 시집을 낼 수 있을까
세월은 가고, 바람은 사위(四圍)를 흔드는데
詩는 더 멀리서 자주 글썽이는데
그러나 어쩌랴, 시 또한 내게 운명인 것을
굼뜬 거룻배 한 척 창파에 놓고
아등바등 노를 젓는 사람아,
대저 내 생애가 겨우 그러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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