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 정충화

마루안 2018. 2. 17. 12:48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 정충화


모든 옷걸이는
옷을 위한 몸이다
주인을 대신하는 또 다른 몸
육신의 껍데기를 끌어안고
기꺼이 제 몸을 빌려주는
누군가의 대역(代役)이다
철 지난 양복을 걸치고
옷장 속 어둠을 거르거나
젖은 셔츠를 입고 빨랫줄에 매달려
햇볕과 바람의 통로를 지키는
수문장이 되기도 하는 것들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나 역시
낡고 찌그러져 가는
한낱 옷걸이일 뿐이다


*시집, 누군가의 배후, 문학의전당

 

 

 

 



삶과의 불화 - 정충화


홀로
밥 먹을 때가 잦다
마주하는 눈길 없이
마른 밥을 삼킬 때마다
삶의 황폐함을 생각한다
건기의 사막처럼
수분이 바싹 말라버린 박토
내 영지의 척박함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한번 끊어져버린 끈은
매듭만으로는 결속력이 약해서
언제고 다시 끊어지게 마련이다

쌀 톨처럼 흩어지는 가솔
약한 매듭을 염려해야 하는 현실
풍파에 대책 없이 휘둘리는 일상들

삶의 변방에 내몰린
내 중년의 한때가
위태롭다




# 정충화 시인은 1959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2008년 계간 <작가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누군가의 배후>가 있다. 제7회 <부천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원,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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