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마루안 2018. 2. 17. 10:22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멀어지는구나
아주 오래 전 떠나온 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돌아가는 길
발을 절며 먼 데 보니
느티나무 한 그루
의지가 되네

인생은
두 발로 안 되면 지팡이를 짚고
그도 안 되면 네 발로
그도 안 되면 죽음으로
무슨 말인가를 지껄이다 가는 것

멀어지는구나, 풍경들
옹알이하던 아이가 등에서 내려와
해시계의 그림자처럼 일생을 돌고
어둠에 묻힌 그 하루

자꾸 늦어지는 벽시계에
새 전지를 끼우고
멀어지는 것들의 속도를 재고 있었다
한 방울 남은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십수 년을 살면서
이게 어디냐고
가끔은 걸레질 비질도 했는데

이제는 더러움에 익숙했는지
그게 다 내 살 같다
빠릿빠릿하다고 다 광이 나는 것도 아닌 삶
게으름도 사는 법(法)이라면 법 같다

술에 치여 보낸 밤도 많았고
화가 나서 뜬눈으로 보낸 날도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놈이, 참 듬직한 걸
보았다, 거미란 놈

눈이 시려 실눈을 뜨고 새벽같이 일어나
칫솔질을 하는데, 이제는 쩍쩍 금이 가는 남의 집
그 틈새에 끼여 거미줄을 치는 그놈은
실은 제 집을 짓는 게 아닌가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사는
내 삶의 한켠에 번듯하게 제 집을 짓는 저 놈
흐릿한 거미줄 틈으로
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더 이상 걷어 낼 거미줄은 아닌 것이다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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