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배경 - 박일만

마루안 2018. 2. 17. 09:26



오래된 배경 - 박일만



골목 안쪽에서 간판을 내건
희망사진관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사진 속 첫 웃음은 여전하다
비바람에 바라도록 색깔을 내준
참뜻도 깊다
담장 위 꽃 무더기나 골목 풍경 배경 삼아
오가는 사람들은 뜬눈으로 촬영한다
진열장을 꽉 채운 표정들
김치,를 외치고 청춘 밖으로 나간 주인공들
지금은 어떨까, 주름은 몇 개가 늘었을까
고집스런 웃음 오히려 편안하다
탈색돼가는 얼굴은
뒷배경이 이울며 그려내는 어제의 오늘일진대
지나가는 바람의 뼈도 포착해 낼 듯한
눈동자들은 늘 추억을 현상해 낸다
허름한 사진관 속
추억에도 힘이 있다



*시집,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서정시학








군산 일박一泊 - 박일만



달려가던 평행선 끝에서
시린 무릎 적시고 있었지
언덕에 누운 당신의 모습은 젖무덤 같았어
높던 파도는 허리 낮춰
기관지 앓는 목선들을 토닥였어
만선을 꿈꾸다 지친 깃발들 창밖을 서성이고
격랑이 지나간 후 숨결 고르는 등 뒤에서
쓸쓸한 어깨로 돌아눕던 항구,
한세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으로 사는 것은
바람에 물어뜯긴 깃발의 흉터처럼
끝내 지울 수 없는 흔적일 뿐이라며
이불 끝을 당겨 더욱 어두워지던 항구,
풍랑에 단단해져 버린 시린 등뼈가 아무리
물에 젖어도 침묵으로 사는 것이 사랑이라 했지
물먹은 듯 무거운 일생을 부려놓고
두 무릎 단단히 끌어안고 모로 잠을 청하던 항구,
기다림도 떠남도 이젠 익숙한 삶이라 했지
기댈 어깨 한 사람 만나지 못하고 살다가
떠나는 것일까 우리는
문득, 눈발이 소금처럼 언덕에 내려
당신의 무덤을 환하게 밝힐 때쯤
눈물조차 인색한 내 생이 부끄러워 서둘러 떠나왔던 항구,
장항 물길 건너 지척인 그 자리
그대, 편히 잠들었는지 궁금한
일박一泊






# 이 시를 읽다가 오래 전에 가랑잎처럼 전국을 떠돌던 시절이 생각났다. 아마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해였을 것이다. 군산과 고군산군도를 여행하기 위해 장항선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다. 종점에서 내려 배를 타고 금강을 가로 질러 군산으로 갔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11월과 군산항의 쓸쓸함은 딱 어울렸다. 혼자 하는 여행은 쓸쓸함을 즐기기 위해 떠난다.


군산항 부근 여인숙에 숙소를 정하고 오래된 골목을 걸었다. 그날 밤 여인숙에 누웠는데 그곳까지 바다 냄새가 풍겼다. 一泊에 泊가 배를 댄다는 뜻이다. 군산 여행의 일박은 이박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는 여인숙에 숙소를 정한다. 많이 사라지고 없는 곳이지만 가능하다면,,  편리함에 익숙해진 일상을 며칠쯤 세월의 풍화에 맡겨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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