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마루안 2018. 2. 16. 19:50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시집, 시간은 사랑이 지나가게 만든다더니, 도서출판 이즘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 4 - 신현수


자기가 살아온 삶 말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사람들은 안타까워하지만
그러나 웬만큼 이 세상을 살아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어
가보지 못한 길도
무슨 대단한 길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을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삶도 대단한 길은 없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 삶은 없어
그냥 사는 거지
다만 바다를 바라보고
아주 잠시 흔들릴 마음이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거지
저 바다 파도치니
아, 이제
그냥 살아야겠어
저 바다 가운데 놓인 다리 위로 비바람부니
아, 이제
나도 살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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