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디오 보는 일요일 오후 - 배정원

마루안 2018. 2. 16. 19:05



비디오 보는 일요일 오후 - 배정원



비디오 화면엔 비 내리고
모르고 또 빌려온 영화가 흐른다
저 속엔 그저 그런 사건이
사건을 불러모아 사건들이게 하고,


창 밖에도 비 내리고
물방울들은 다시 지리한 윤회를 시작한다
이 곳에 떨어진 놈들은
긴 여행길의 시작부터 잘못되고


있다, 나와 일요일 오후가
사건들과 물방울들이,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머리나 감을까? 머리나 감아 보자
전화나 걸까? 전화나 걸어 보자
밖에나 나가볼까? 밖에나 돌아다녀 보자


비디오 화면엔 비 내리고
내 발바닥 옆에 출몰한 바퀴벌레 한 마리
일생일대의, 단 한 번의 마지막 사건을 향해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다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삽화 78 - 배정원



우리집의 가장(家長)은 절망이었다
절망이 술을 마시러 간 사이
그 틈을 우리는 희망이라 불렀다
노오란 들꽃을 꺾어 들고
희망이 눈치를 보며 놀러오면 우리는
단칸방, 깨어진 유리창에 걸린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소아마비의 누이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에
잊었던 옛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행상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저녁을 지을 무렵
술 취한 절망이 돌아오면 희망은
깨지는 사기그릇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폭력과 울부짖음과 이유없는 살기만이
유년(幼年), 우리들의 스케치북에
꽃 피지 않는 봄 풍경을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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