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2월은 홀로 걷는 - 천양희

마루안 2018. 2. 16. 19:39



2월은 홀로 걷는 - 천양희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 듯 받으며 소리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할 수 없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걸었다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성(聖)고독 - 천양희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 바쳐
예순여섯 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고백하는 뱃고동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 소리를 고통 소리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손을 타면 닳게 마련인데
고독만은 그렇지가 않다 영구불변이다
세상에 좋은 고통은 없고
나쁜 고독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공사중인데
고독은 제 온몸으로 성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