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마루안 2018. 2. 15. 20:51

 

 

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머리칼 까만 그믐밤에도
동산 솔숲 아래께가 훤한 것은
새똥처럼 흩뿌려진 추억들이 조곤조곤
부서지고 있기 때문

장대비 멎은 저녁답
끄무레한 벌판을 휙휙 나니는 도깨비불은
누군가를 깊이 연모(戀慕)하는 넋이
누군가를 향하여 부서지는 것

별들도
태초의 어둠덩어리가 잘게 부서진 연유로 반짝거리고
오래 움츠렸던 기다림이 잘게, 잘게 부서질수록
화안해지는


아가야, 이 저녁 내 얼굴이 환해짐도
먼발치에서 일렁이는 물결에
가슴속 켜켜이 쟁여진 응어리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까닭이라면
잘게 부서진 것들은 모두 반짝거리고
깊이 모를 사랑은 늘 서늘한 것이로구나


*시집, 애기앉은 부채, 문학의전당

 

 

 

 

 


망두석 - 차영호


그 해 눈 속 장고개 외딴 터에 든
밤손님

순경 출신 아부지가 지게꼬리로 오라 질러
오송 지서 쪽으로 끌어냈다지
철둑께에 이르러
오랏줄 느슨하게 풀어주며 담배 한 대 권하고는
괘리 풀고 봇도랑을 건넌 까닭
눈밭에 쭈구려 앉아 큼큼, 헛기침 해댄 까닭

짐짓 똥 한 파내기 퍼지르고 괴춤 추스르며 둑길로 올라서니 여전히
둥구나무에 걸린 열아흐레 달처럼 둥두렷한 눈망울

―에그, 이 위인아

담배 한 개비 다시 불붙여 물려주고
지게꼬리 풀어 논바닥 멀리 내던지고
한참을 되돌아와도 우두머니 서 있는
어여 가라고 손짓해도 마냥 서 있는

냅다 되쫓아가는 시늉에
휘익, 철둑 넘어 돛 달더라는



 

# 차영호 시인은 1954년 충북 청원 출생으로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 부채>가 있다. 한국작가회의, 무크지 <문학만>, 시동인 <푸른시>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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