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마루안 2018. 2. 15. 12:31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어제는 눈 내리고
오늘은 바람 몹시 불었다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지막한 음성에 놀라 창 밖을 보니
백운대, 인수봉이 가까이 와 있다
늘 마주하는 이웃이지만
언제나 찾아가는 일은 나의 몫
한 구비 돌아야 또 한 구비 보여주는
생은 힘들게 아름다워
휘청거리는 그림자에 등 내밀어주는
침묵 뿐 이더니
곧게 자란 몇 그루 소나무 위의 잔설을 털며
몇 년 묵었어도 아직 향기 은은한 작설 잎을
구름에 씻어낸다
멀리 떨어져야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
한 걸음에 다가가면 홀연히 모습 감추는 사람
혹시, 하고 물어보니
눈보라 헤치며 홀연히 자리를 뜬다
간 밤의 긴 갈증
머리 맡에 냉수 한 사발은 그대로인데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포엠토피아

 

 

 

 

 

 

그 겨울의 찻집 - 나호열

 


이 새벽에
떠나가는 사람이 많구나
돌아가는 사람이 많구나
초점을 잃은 채 불빛은
유리잔 부딪는 소리로 흩어지고
겨울의 찻집에서 그에게 전화를 건다
지친 나그네가 되어 두드리는 문의 저 편에서
꽃다발을 들고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데
그는 늘 시린 등뒤에서 절벽을 껴안고 있다
알라딘의 램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
알라딘의 램프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
주홍글씨를 달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은 강물로 울고 있는지 그는 알아
내가 하고 싶은 그 말을
내가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안녕 이라는 한 마디로 대신한다
겨울 밤 찻집에서 그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나 숨차게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지
그는 부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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