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직 적막 - 허형만

마루안 2018. 2. 15. 18:55



오직 적막 - 허형만



한 생애가 텅 빈 항아리 같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파도도 고요해지고

창문에 반짝반짝 별빛을 매달고 달리던

야간열차의 기적 소리도 아스라이 잦아지고

나의 한 생애여, 이제는

오직 적막

한때는 부글부글 들끓음으로 가득 찼으나

한때는 한기 돋는 소소리바람에도 출렁거렸으나

나의 한 생애여,

이제는

오직 적막 



*시집, 가벼운 빗방울, 작가세계








종심(從心)의 나이 - 허형만



참 멀리 왔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나보다 더 멀리서 온 현자(賢者)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어떤 이는 말을 타고 가고
어떤 이는 낙타를 타고 가나
그 어느 것도 내 길이 아니라서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 새삼 후회한들 아무 소용 없느니
왔던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가야 할 길 가뭇하여 아슴하나
내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할 수 있으리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길섶
해와 달, 낡은 발끝에 치일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노라고





# 설 연휴가 시작된 첫날 거리가 많이 한산해졌다. 북적였던 어제와 비교하면 적막함을 느낀다. 이런 한산함이 좋아 가까운 절까지 걸었다. 내가 사는 신촌은 안산과 지척이다. 불자는 아니지만 이따금 여기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또 나이를 한 살 보탠다. 시인이 말한 종심의 나이까진 멀었지만 오십대의 세월도 가속도가 만만치 않다. 질풍노도의 세월 동안 보태기만 하고 덜지를 못했다. 나이의 무게 만큼 비우는 일도 필요하건만,,,, 마음 속에 적막 하나쯤 간직하고 사는 것도 괜찮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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